과학을 이해의 언어로, 미래 세대에게 더 가깝고 쉽게

박병철 물리학자, 과학 도서 번역가(물리학 79)
  • 2026.05.18

번역가라고 하면 흔히 외국어에 능숙한 사람을 떠올린다. 하지만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다른 말로 치환하는 작업에 머물지 않는다. 특히 과학책 번역은 훨씬 더 복합적인 영역이다. 난해한 이론과 전문 지식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말로 다시 풀어내야 하기 때문. 물리학자이자 과학 도서 번역가인 박병철 동문은 지난 35년 동안 바로 그 일을 해왔다. 물리학자로서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수많은 과학책을 우리말로 번역하며, 독자들이 더 쉽고 빠르게 과학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과학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문을 열었다. 이론서부터 대중 과학서까지, 오늘날 국내 과학 번역서 가운데 그의 이름이 없는 책을 찾기 어려울 정도. 특히 미래 세대가 시행착오 없이 과학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그가 과학책 번역을 통해 전하는 가장 큰 가치다. 

 

어린 시절부터 친숙했던 과학을 진로로

박병철 동문에게 과학은 어린 시절부터 친숙하게 일상에 스며든 세계였다. 특히 천문학과 물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에는 늘 과학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다 그에게 ‘과학'이 보다 실제적으로 각인되는 사건이 찾아온다. 바로 1969년 전 세계 과학계의 이목이 집중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미국 유인우주선인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죠. 당시 우리나라에서 임시공휴일로 지정할 정도로 큰 화제였어요. 그 시절에는 TV를 가진 집이 드물어서 동네 사람들이 TV가 있는 집으로 모였죠. 그런데 사람이 너무 빽빽이 들어차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아폴로 11호의 발사부터 귀환까지를 그려가며 설명해 주셨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TV를 보던 동네 사람들도 하나둘 주변으로 모여들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죠.”

 

대학 전공 선택을 앞두고는 과학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고 곧잘 했던 수학에 대한 흥미를 살릴 수 있는 진로를 모색했다. 당시 우리 대학교는 수학, 물리, 화학과를 한 계열로 선발했고, 박 동문에게 딱 맞는 전공이었다. 2학년 전공 선택 시 수학과를 희망했지만, 평소 물리학 점수가 좋았던 그에게 교수님은 물리학 전공을 적극 추천했다.

 

“처음에는 물리학과 수업이 잘 맞지 않았어요. 게다가 당시엔 휴교령까지 내려져 실제 학교에 나간 기간이 한두 달 정도였죠. 거의 공부를 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수리물리학을 가르치셨던 박용문 교수님의 강의가 굉장히 어려웠거든요. 학생들이 잘 따라오지 못하니까 굉장히 엄하게 독려하셨어요. 공부에 게을렀던 저에게는 오히려 큰 자극이 됐죠. 책임감을 가지고 공부하도록 만든 계기였어요.”

 

대학 생활의 틈 속에서 찾은 낭만

당시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대학 생활은 빈구석들도 많았지만, 그 안에서도 박병철 동문은 자신을 채울 또 다른 뭔가를 찾았다. 지금처럼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지만 낭만이 있었다.

 

“그때 남학생들이 공부 외에 즐길 수 있는 건 딱 세 가지였던 것 같아요. 당구, 데이트, 술. (웃음) 저는 그중 당구에 푹 빠졌고 지금도 집에 당구대를 둘 만큼 좋아해요. 음악도 무척 좋아했죠. 대학 1학년 때부터 고전음악 감상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공연도 하고, 오페라를 각색해 무대에 올리기도 했어요. 그 시절엔 집집마다 오디오가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명동이나 충무로 음악 감상실에 자주 갔죠. 명동 ‘필하모니’에 걸려 있던 수많은 LP들이 아직도 기억나요. 그곳엔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클래식 음반들이 있었죠. 어쩌면 지금 스마트폰 하나에 담기는 음악보다 적은 양일지도 모르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열정적으로 문화를 만들어갔던 것 같아요.”

 

박 동문이 대학 시절 즐겼던 낭만 거리들은 현재 취미 생활로 이어지고 있다. 기타 연주를 즐기고 당구 실력도 수준급 이상이다. 또 과학자답게 플라모델을 만들어 수집하고 있다. 

 

학문과 사색 사이, 자신의 시간을 걷다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표현하는 박병철 동문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로 곧장 나아가는 일이 한편으로는 두렵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내향적인 성향에 학문에 대한 흥미까지 더해지며 그의 선택은 자연스럽게 대학원 진학으로 이어졌다. 우리 대학교 대학원에서 핵물리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카이스트에서 이론 입자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후 오랜 시간 대학 강단에도 섰다.

 

하지만 당시 그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학문만이 아니었다. 박사과정 선배를 통해 우연히 접한 명상의 세계에 매료되어, 북한산 산장에서 명상과 사색 속에 머물며 약 10년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하러 내려왔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 동안 박 동문은 자신의 내면에 깊이 몰두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키웠다. 고요한 산속에서의 생활이 지루할 것 같지만, 박 동문은 그 안에서도 특유의 호기심을 잃지 않아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다. 

 

“산장에서 살다 보니 날이 저물면 촛불을 켜고, 자기 전에 끄는 일이 중요한 일상이었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반딧불이나 눈에 비친 달빛으로 공부했다는 이야기잖아요. 그게 정말 가능했을까 늘 궁금했었거든요. 그래서 직접 실험을 해봤어요. 반딧불을 잡아 비닐봉지에 넣어 천장에 매달아 봤는데, 불빛이 아른아른 흔들리더라고요. ‘이러다 눈 버리겠다’ 싶었죠. 눈 오는 날에도 해봤어요. 그런데 눈 오는 날은 대개 흐려서 달이 잘 안 떠요. 운 좋게 보름달이 떠도 큰 글자 정도만 겨우 보이더라고요. 나중에 카이스트 졸업식에서 총장님이 형설지공 이야기를 하시길래, 친구들에게 ‘너희는 실제로 형설지공을 해봤냐’고 농담했던 기억이 나요.”

 

박 동문은 한때 인도로 가 구도자의 삶을 살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와 현실적인 여러 이유로 그 꿈을 접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내면에 몰두했던 시간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앞으로의 삶을 위해 자신의 세계를 견고하게 다지는 수련이 되었다.

 

과학책 번역가로 새로운 길을 만나다

박병철 동문이 처음부터 과학책 전문 번역가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원 시절에는 소승불교 경전 일부를 번역해 <선사상> 잡지에 기고하는 등 간단한 번역 작업을 해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일이었다. 그러던 1991년, 그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온다. 대우재단이 전국 학자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번역 사업 공모를 진행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내 출판계에서 과학 서적은 대중성이 낮은 분야였지만, 이 사업은 일반 출판 번역료의 몇 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화제가 됐다. 박 동문은 이 공모에 선정되며 본격적으로 번역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1997년 한 권의 수학책을 주도적으로 번역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번역 공모 사업에서 처음 맡았던 책이 양자전기역학(QED)을 쉽게 설명한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 강의>였어요. 그 일을 계기로 출판사들과 인연이 이어졌죠. 어느 날 출판사에서 ‘괜찮은 책이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수학책 한 권을 권했는데, ‘수학책은 안 팔린다’며 난색을 보였어요. (웃음) 그런데 저는 꼭 우리나라에 소개돼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끝까지 설득해서 출간하게 됐죠. 그 책이 바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예요.”

 

출판사의 우려와 달리 그 ‘수학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수학계 최대 난제로 꼽히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둘러싼 350년간의 도전과, 영국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Andrew Wiles)의 극적인 증명 과정을 담은 이 책은 많은 독자들을 수학의 매력 속으로 끌어들였다. 특히 학생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수학 분야 최고의 교양서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꾸준히 읽히고 있다. 박병철 동문에게도 이 책은 각별한 의미로 남아 있다. 과학 단행본 번역을 자신의 업으로 삼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기 때문이다. 번역을 통해 누군가에게 과학을 보다 쉽게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책 번역가로서 사명감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 책이다. 

 

“그 책으로 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공교롭게도 출간 당시 IMF 외환위기가 터져서 번역료를 몇 년 뒤에야 받을 수 있었지만요. (웃음) 이후 <엘러건트 유니버스(The Elegant Universe)> 같은 책들도 번역하게 됐고요. 지금 활동하는 과학자분들 가운데에도 ‘그 책을 읽고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 ‘수학의 재미를 처음 알게 됐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큰 보람을 느끼죠.”

 

이해하기 쉽게, 과학을 우리글로 다시 쓰는 사람

박병철 동문은 이후 출판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35년 넘게 과학책 전문 번역가로 활동해 왔다. 지금까지 번역한 책만 130여 권. 물리학과 수학은 물론 천문학, 의학, 과학철학까지 분야도 폭넓다. 과학책은 높은 전문성과 정확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까다로운 영역이지만, 그는 오랜 시간 출판사들이 먼저 찾는 번역가로 자리매김해 왔다. 늘 두세 권의 작업이 동시에 진행될 만큼 그의 손을 거친 번역에 대한 신뢰는 두텁다.

 

그의 번역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외국어를 잘 옮기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리학자로서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복잡한 과학 이론과 개념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글에 맞는 번역을 하기 위한 집념과 문장 감각까지 더해진다. 

 

“과학철학 책을 몇 번 번역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절실하게 느낀 게 언어의 한계였죠. 독일에서는 철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 오래 축적된 어휘가 있어요. 짧은 단어 하나로도 의미 전달이 돼요. 그런데 우리말에는 대응하는 개념어가 없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니 길게 설명할 수밖에 없고, 독자는 더 어렵게 느끼게 되죠. 특히 자연과학은 대부분 외국에서 들어온 학문이잖아요. 결국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그런 번역서가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공부했나 싶을 정도예요. 차라리 유학 가서 배우는 게 더 쉬웠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그는 언제나 전달하고자 하는 과학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문장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다시 써내는 것이다. 오랜 시간 번역을 하며 쌓아온 자신만의 원칙과 노하우도 있다. 

 

“중요한 건 인과관계가 명확한 문장을 쓰는 거예요. 괜히 멋 부리지 않고요. 약간의 유머를 넣어 독자가 흥미를 느끼게 하기도 하죠. 저는 문장을 읽으면 완전히 이해한 다음, 머릿속에서 영어 문장을 지워버려요. 그리고 제가 이해한 방식대로 다시 씁니다. 영어는 무생물 주어가 많지만 한국어는 사람이 주어일 때 자연스럽거든요. 그래서 주어를 바꾸기도 하고, 같은 종결 표현이 반복되지 않게 운율도 조절해요. 때로는 평서문을 의문문으로 바꾸기도 하죠.”

 

박 동문의 작업은 흔히 생각하는 번역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다. 문장을 단지 우리말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가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롭게 다듬는다. 이로 인해 그의 번역서는 원문과 비교했을 때 전혀 다른 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원문을 단순히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이 아니라, 편집과 재구성, 윤문의 영역까지 확장해 작업한다. 이러한 과정은 비범한 암기력과 더불어 어릴 적부터 남다른 글쓰기 재능이 있었던 박 동문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과학책 번역가’는 운명 같은 일이다. 

 

인생의 버킷 리스트, 뉴턴의 <프린키피아> 번역

2023년, 박병철 동문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한 권의 책을 번역했다. 흔히 <프린키피아(The Principia)>라고 부르는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이다. 1687년 출간된 이 고전은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 법칙, 천체 운동의 원리 등을 하나의 체계로 정리하며 근대 물리학의 출발점을 만든 책으로 평가받는다. 자연 현상을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해 낸, 물리학의 구약성서와도 같은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프린키피아>는 악명 높은 난해함으로도 유명하다. 수학적 언어와 논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끝까지 완독하고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박병철 동문은 오랜 시간 이 책을 ‘반드시 번역해 보고 싶은 책’으로 꼽아왔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과학자가 뉴턴이에요. <프린키피아>를 번역해 보는 건 오랫동안 제 버킷리스트였죠. 뉴턴의 머릿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또 대부분의 과학책들이 결국 이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잖아요. 그만큼 영향력이 큰 책인데도, 워낙 복잡한 수학 언어로 쓰여 있어서 끝까지 제대로 읽고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저 역시 쉽지 않았죠. 2년 동안 뉴턴의 사고를 따라가며 헤맸어요. 가장 힘들었던 책이지만, 동시에 저를 물리학자로서 한 단계 더 성장시킨 책이기도 합니다.”

 

박 동문에게 <프린키피아> 번역은 단순한 출간 작업 이상의 의미였다. 과학의 근원을 이해하고 싶은 한 물리학자의 오랜 탐구이자, 후대 독자들이 더 쉽게 뉴턴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작업이었다. 수백 년 동안 과학의 토대를 이뤄온 책을 우리글로 다시 풀어내며, 그는 또 한 번 ‘과학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하는 일’의 의미를 스스로 찾았다. 이 책이 누군가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과 사명감이 번역의 괴로움을 견딜 수 있게 했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과학책으로 미래 세대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난해하기로 유명한 <프린키피아>를 비롯해 수많은 과학책을 번역해 오며, 박병철 동문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을 어려워하는 이유가 단지 내용 자체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잘못된 번역과 어색한 문장이 독자들을 과학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예전에도 과학 번역서는 많았어요. 그런데 그걸 읽고 정말 이해했다는 사람은 거의 못 봤죠. 제가 어릴 때는 책에 적힌 내용은 무조건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생각하던 시대였어요. 요즘처럼 비판적 독서의 개념이 없었죠. 만약 읽고 이해가 안 되면,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죠. 다른 책을 찾아 띄엄띄엄 이해하려고 하고요. 내가 모자란 줄만 알았지, 번역이 잘못됐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번역을 하다 보니 알게 됐어요. 원래 어려운 게 아니라 번역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정말 많다는걸요.”

 

그에게 번역은 책임감이 됐다. 특히 과학을 처음 접하는 어린 학생들이 책 앞에서 좌절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지금 과학을 배우는 아이들도 예전의 저처럼 길을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적어도 제가 번역한 문장만큼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자는 생각으로 작업해 왔어요. 독자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박 동문은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의외로 아이들과 잘 통한다는 그. 강연이 끝난 뒤 학생들이 자신의 번역서를 들고 사인을 받으러 줄을 서곤 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번역한 책을 손에 들고 있으니 그들이 과학을 이해할 때 시간을 좀 절약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그 순간 큰 보람을 느낀다. 때문에 박 동문의 번역서에는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 늘어간다. 

 

6월에는 그의 번역을 통해 어린이를 위한 과학책 <과학을 꿰뚫는 세 가지 질문>이 국내에 선보인다. 또 직접 어린이 과학 동화도 집필했다. <별이 된 라이카>에서는 강아지가 로켓을 타고 우주로 향하는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에게 과학적 상상력을 전했고, 20권으로 구성된 <나의 첫 과학책> 시리즈에서는 뉴턴, 에디슨, 다윈,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과 함께 과학의 이론과 역사를 쉽고 흥미롭게 풀어냈다. 우주, 자동차, 기차, 비행기처럼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재를 적극 활용해 과학을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에는 또 다른 어린이책도 준비 중이다. 잘 알려진 명작 동화 속에서 과학 원리를 발견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어린 왕자>를 통해 중력과 우주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박병철 동문은 우리 사회에서 과학과 수학이 입시를 위한 과목으로만 소비되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전공자가 아닌 이상 성인이 되면 과학과 수학을 멀리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때문에 그는 아이들이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과학을 만날 수 있도록 강연과 번역,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과학이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시험 과목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즐거운 이야기로 남기를 소망한다. 

 

AI 시대에도 대체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번역

AI 번역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번역가라는 직업의 미래를 우려하는 시선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박병철 동문은 오히려 ‘좋은 번역’의 기준이 더 선명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단순한 문장 변환을 넘어 언어와 문화, 맥락까지 이해해야 하는 수준 높은 번역에는 여전히 인간만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서로 다른 언어 구조를 가진 언어 간 번역은 더욱 그렇다. 

 

“알파벳 기반 언어를 쓰는 나라들은 문법 구조가 굉장히 비슷해요. 그래서 AI 번역기로 돌리면 꽤 괜찮은 수준까지 나와요. 그런데 그걸 중국어나 일본어, 한국어처럼 구조가 다른 언어로 옮기면 아직은 어색하죠. 물론 예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건 맞아요. 하지만 결국 완성도의 차이는 마지막 단계에서 갈립니다. 처음에는 성능이 빠르게 올라가지만, 99.9%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 마지막 차이가 결국 수준을 결정하는 거죠.

앞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번역가로서, 그가 도전해 보고 싶은 책이 있을까. <프린키피아>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선 지금도 박병철 동문의 탐구는 끝나지 않았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다음 목표가 있다. 역시 과학의 역사를 바꾼 한 과학자의 책이다. 새로운 세대가 더 쉽고 정확하게 과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는 오늘도 또 다른 ‘번역의 산’을 바라보고 있다.

 

“기원전 시대에 기하학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 있어요. 바로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죠. 그가 쓴 책에는 초등학교에서도 배우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와 같은 기초 원리들이 담겨 있어요. 2천 년도 더 전에 쓰인 책이 지금까지 읽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경이롭죠.”

 

스스로는 새로운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성향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지만, 사실 박병철 동문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과학’이라는 세계를 현재,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 온 사람이다. 자연철학에서 출발해 인류가 수백, 수천 년 동안 쌓아온 과학의 지식과 사유를 우리말로 풀어내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가까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미래 세대가 불필요한 시행착오 없이 과학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탐구하는 즐거움 자체를 발견하는 것. 그래서 그의 번역은 단지 책을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누군가가 과학과 만나는 즐거운 순간을 만드는 일에 가깝다.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과학이 그의 문장을 통해 조금 더 쉽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가가길,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또 다른 누군가의 호기심과 꿈을 깨우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