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발을 붙여 진실을 담아내는 영화
- 2025.09.17
올해 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계는 다소 아쉬운 결과를 냈다. 수많은 거장 감독들이 있지만 한국 영화 중 초청받은 작품은 단 한 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을 엿보기도 했다. 전 세계 영화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쟁 부문 ‘라 시네프(La Cinef)’에서 최초로 1등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허가영 동문이 그 주인공이다. 인간의 본질, 생의 살아있는 의미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허 감독의 영화는 오랫동안 ‘땅에 발을 붙이는’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진실을 담아내고자 하는 그의 세계가 담겼다. 사적인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이야기로 세계의 공감을 이끌고 관객들의 극찬을 받은 허가영 감독은 이제, 전 세계 영화계의 라이징 스타 감독이 됐다.
허가영 동문은 대학 생활을 꽤 오래 했다. 8년 동안 휴학을 여러 번 하며 긴 시간 동안 탐색의 시간을 보냈다. 십대 시절에도 답답한 교육 시스템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일이 힘들어 돌파구를 찾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회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를 자퇴하기도 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어린 시절부터 품고 있었다.
“학교 밖을 벗어나 스스로 내 길을 결정하며 삶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성인이 됐을 때 중심을 잡고 나아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죠. 대학생활은 사실 즐거웠어요. 성적도 좋았고, RA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한두 학기 지나면 루틴한 생활이 힘들어지기도 했어요. 학교 밖이 너무 궁금했고요. 회사에 다녀보기도 하고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일도 해보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8년간 학교를 다녔네요.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자 싶었고, 경영학 전공이 맞진 않았지만 사실 공부도 재미있게 최선을 다했죠. 오죽하면 친구들이 제가 학교 뽕을 뽑았다고 할까요. (웃음)”
허 동문의 ‘남다른’ 방황은 현실이 싫어 도피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 있었다. 그 스스로를 가두는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 세상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이 허 동문을 자극했고, 사회를 향하게 했다. 그의 시야가 확장될수록 질문으로 세상의 틈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허가영 동문은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두고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글 쓰기, 사고의 깊이를 얻을 수 있었던 철학 등 관심 가는 공부라면 무엇이든 배우고 흡수했다. 재학 중 의미 있었던 일로 <공정감각>이라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아낸 책 발간에 참여한 것을 꼽는다. 당시 캠퍼스 안팎에서 이슈가 됐던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목소리를 담았다.
“나임윤경 교수님과 <공정감각>이라는 책을 만드는 데 참여했어요. 학교를 다니며 감사했던 것 중 하나는 제가 항상 지니고 있던 사회에 대한 시선이나 문제의식들을 공유할 수 있는 학우들과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거예요. 많이 배웠고 또 자양분이 되어서 창작활동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고요. <공정감각>이라는 책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도 당시 청소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는 공정대책위원회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단체에 좀 깊이 몸을 담았었고, 이를 통해 학교에 목소리를 내보고 학생으로서는 대화하거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노동자분들과 연대하면서 그들의 세밀한 삶을 또 알게 되고. 그런 게 저는 참 좋았습니다. 뭔가 가서 닿지 못했던 삶들을 알게 됐다고 할까요.”
20대의 절반 이상을 학교에 있으며 허가영 동문은 다양한 이야기를 만났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창작활동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고 소통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더 들여다보고 그만의 이야기로 다져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허 동문에게는 늘 무언가 불안정함, 외로움이 따라왔다.
“검정고시를 보며 나는 사회의 부적응자라거나 어긋난 사람일까, 하는 생각에 외로움이 있었어요. 사회의 생애주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혼란스러움이었죠. 그런 것들을 글로 쓰곤 했는데, 영상이란 매체에도 관심을 갖게 됐죠. 창작한 글을 바탕으로 당시 UCC 대회나 청소년 영화제 등에 응모하기도 했어요. 그때 받은 상금으로 더 좋은 영상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힘으로 아이맥을 사기도 했죠. 청소년기 가장 큰 성취였죠.”
영상을 통해 세상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가장 큰 기쁨을 준 것은 자신의 영상을 본 사람들이 그들의 느낌, 공감을 전할 때였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하며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감각들로 충만했다. 이런 경험을 시작으로 영상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그러나 대학 시절엔 예술이나 영화가 얼마나 힘이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따랐다.
“영상 매체를 통해 자꾸만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소통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고 영화를 통해 사회에 아주 작은 변화, 균열을 내는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간접적인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 바로 우리 앞에 시급한 사회 문제들이 있는데, 큰 자본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운 일로 느껴질 때가 많았어요. 좀 더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변화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렇게 20대의 저는 조금은 무기력했고,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 깨달았죠. 결국 나는 창작자다. 정치사회학적으로 연구를 하거나 제도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고 그것이 예술에 담겨 말을 건넬 때 더 행복한 사람이다, 그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20대였어요.”
그러나 스스로 예술을 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싶었다. 그럼에도 그는 영화 가까이에 있고 싶었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산업의 측면에서 영화에 접근했고, 휴학 중 당시 오리지널 영화 콘텐츠 제작을 시작하는 카카오페이지 팀에서 현업의 실무를 경험해 보기도 했다. 영화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기에 도전했던 일이지만 실제로도 흥미로웠다.
“주변에 영화인도 없었고,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은데 막막하고. 학교도 다녀야 하고 과제도 많고 이러니까 삶이 자꾸 떠있는 것 같았어요. 그때는 호기심도 너무 강해서 자꾸 영화를 뒤돌아보기만 하고 내가 가지는 못하는, 자기합리화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산업계를 경험하다 보니 나는 파는 일이 아니라 만드는 일을 더 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이 되게 명확해졌어요.”
가야 할 길을 찾은 허가영 동문은 졸업 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해 1년 동안 영화 제작 실무를 배우며, 두 편의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적은 예산, 짧은 제작 기간의 한계가 있었지만 온 마음을 담아 영화를 만들었다. 인간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담은 허 동문의 영화는 78회 칸 영화제에서 학생 영화 부문인 ‘라 시네프(La Cinef)’ 카테고리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1등상을 수상했다. 라 시네프는 전 세계 영화학교 학생들의 중단편 작품이 출품되는 경쟁 부문으로 많은 거장 감독들이 거쳐간, 젊은 감독들의 등용문으로 여겨진다. 그가 출품한 영화 <첫여름>은 손녀의 결혼식이 아닌 남자친구의 사십구재에 참여하고 싶은 영순의 이야기다. 가족을 위한 삶으로 갇혀 지낸 영순의 일탈이자 잃어버렸던 삶을 찾아 바깥 세상으로 나오는 선택. 할머니가 아닌, 한 여자로서의 가장 찬란한 여름을 비춘다. 아직 20대인 허가영 동문은 왜 노인의 삶을 소재로 삼았을까.
“영화인이 되면서 연출자로서 가장 크게 염두에 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 삶에 대한 이해를 하고 싶다는 갈증이었어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가진 역사, 사회적인 맥락에서 그려지는 모습,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모습, 그런 인간 자체에 대한 것들이 저에겐 흥미로웠어요. 대학 시절 수강했던 노인복지론 수업의 과제로 할머니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당시 <연세지>라는 교지에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도 했는데 그때 노인에 대한 관념이 전복되고 새롭게 확립되는 경험을 하게 됐어요.
영화 <첫여름>의 영순 캐릭터는 허가영 감독의 할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캐릭터이다. 청소년기에 할머니와 수개월 동안 함께 지낸 시기가 있었는데 허 동문은 우리 사회가 그리고 있는 전형적인 할머니의 모습과 다른 자신의 할머니에게 놀랐다고 한다.
“사실 저희 할머니는 영순 캐릭터와는 조금 다르셨어요. 자신을 가꾸는 멋쟁이였고, 매일 밤 마스크팩을 하면서도 제게 단 한 번도 나눠주지 않았죠. 여자로서의 욕망에 솔직하셨던 것 같아요. 2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즈음 제가 영화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시기랑 맞물려 있었고, 할머니의 사십구재를 갔는데 그때 그 넓은 대웅전에서 불경 음악에 맞춰 할머니가 춤추는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재생되면서 꼭 구현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그 장면을 위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어요.”
허가영 감독은 자신의 할머니뿐 아니라 시나리오를 쓰면서 실제 노인들의 삶을 들여다 보며 그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욕망,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느끼기 위해 허 동문은 노인들의 사교 장소인 카바레를 수없이 가보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모습을 보았다.
“노인들의 음지 문화로 여겨지지만 제가 직접 가보았을 때 그 문화가 굉장히 건강하고 아름다웠어요. 흔히 주책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의 할머니, 나의 할머니의 모습이 진짜 있었거든요. 제가 할머니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노인들이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역으로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매 순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그런데 노인들의 그런 욕망을 표현하고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노인들에게 너무 잔인하게 곁을 주지 않고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닐까 싶었어요.”
허가영 감독이 통찰한 노인들의 모습은 사실 생존하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가장 인간적인 움직임이었다. 살아있는 존재로서 노인의 모습을 영화에 담았고, 이 보편적인 정서가 끌어안고 있는 가치는 결국 글로벌에서도 통했다. 그래서 허 동문은 이 이야기가 노년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닮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처음 칸 영화제에서 초청 메일을 받았을 때 믿기지가 않았다. 스팸 메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현실로 이뤄졌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와 동료들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뼈를 깎는 시나리오 작업, 함께 고생한 스태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프로그램이 선정된 이유가 메일과 함께 와요. 가장 뿌듯했던 것은 가장 인간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선정 이유였어요. ‘요즘 영화계에 인간을 조명하는 영화가 많이 없다고 느꼈고, 장르적인 쾌감이나 소비되는 영화들이 많이 나오는 시대에 저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시선으로 휴머니즘이 가득한(full of humanism)의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죠.”
포스터/사진 출처: Festival de Cannes Homepage
수상 발표는 칸 영화제 현장에서 이뤄진다. 2679편의 응모작 중 1등 선정작으로 불렸을 때의 감격은 단순히 기뻤다는 것을 넘어 초현실적이었다고 회상한다. 무엇보다 그가 동경하던 거장들과 전 세계에서 모인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에 공감했다는 사실 자체로 행복했다.
“심사위원장이 제가 제일 존경하는 마렌 아데(Maren Ade) 감독님이셨어요. 눈 앞에서 제게 상을 주고 작품이 좋다고 말씀해 주시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었고, 의미가 컸어요. 가장 좋았던 것은 관객분들을 만났던 것이죠. 학생 영화로 잘 만날 수 없는 배경의 사람들이 내 영화를 봐주고, 어떻게 느끼는지를 곁에서 볼 수 있으니까요. 많이 웃고 우시더라고요. 한 번은 남미에서 오신 할머니들이 재미있다,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가 주인공인 영화가 거의 없는데 노인의 이야기를 해 줘 고맙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울림이 컸어요. 내 이야기가 그들에게 닿고, 캐릭터에 몸소 들어가 무엇인가를 체험하는구나, 관객의 언어로 제 영화가 재해석되고 확장되는 것이 좋았어요. 사실 그것이야말로 영화의 존재 이유니까요.”
허가영 동문은 <첫여름>을 제작하며 스스로 경계하기도 했다. 작품을 쓰며 가장 두려웠던 것은 ‘할머니 이야기를 팔아 졸업 작품을 찍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깊은 고민을 하며 진심으로 ‘진실’을 담고자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제가 누군가의 삶을 담보로 가볍게 그려 상처받게 한다면 모든 출발을 배신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우리 사회의 많은 시선이 그러하듯 노인의 삶을 납작하게 그리는 것을 피하려 했고, 또 그것을 목표로 삼았죠. 그런데 많은 노인 분들이 재미있게 봐주셔서 큰 위안을 얻었어요.”
특히 허 동문은 여자로서의 삶을 좀 더 현실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노인이 아니라 노년의 여성, 그리고 모든 여성들이 마주하게 될 그 시간들을 보다 세밀하게 그리고 싶었다.
“여자의 삶을 이해했고 한 여자의 삶을 느껴봤고 이 여자와 동행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학수와의 사랑이 주가 아니라, 학수의 죽음을 통해 영순이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영화이고 그 궤적을 세밀하게 그리고자 했어요. 단순히 내가 사랑했던 남자를 애도하기 위해서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본인의 삶을 애도하는 선택처럼 비춰지기를 바랐죠.”
그래서일까, 초기 시나리오는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성이 더 드러나도록 손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할머니의 삶을 담았었다. 젊은 세대가 노인 세대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었지만 주인공이 손녀이기에 한계가 있었다. 시나리오에 대한 반응은 좋았지만 정작 허 동문은 손녀 캐릭터가 궁금하지도 사랑하게 되지도 않았기에 프로덕션 직전 과감하게 영순이 주인공인 시나리오로 방향을 바꿨다. 스스로 경계하며 쓴 시나리오기에 너무 고통스러운 과정이자 진실을 마주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현장에서, 편집을 하는 모든 과정에서 제가 쥐고 있었던 단어는 진실인 거 같아요. 영화가 정말 진실처럼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영화는 픽션이지만 그나마 진실 곁에 머무는 이야기로 본인이 사랑하는 얼굴들, 기억하는 얼굴들을 떠오르게 하는 영화가 된 것 같아서. ‘진실과 얼굴’ 이 두 단어로, 이 영화를 표현하고 싶어요.”
칸 영화제로 주목을 받으며 인터뷰나 미팅으로 바쁘게 지내는 허가영 동문이지만 이미 장편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역시나 여성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두 작품 정도를 준비하고 있는데, 하나는 <첫여름>과 비슷한 흐름의 중년 여성에 대한 이야기예요. 항상 사회의 정상 속에서 벗어나 삶을 살았다고 느끼는 여자의 이야기죠. 두 번째는 기사를 읽다가 정육점에서 임신 중단약이 밀매된다는 기사를 봤어요. 남자친구랑 같이 그런 약을 밀매하는 10대 후반의 여자 이야기를 장르적으로 풀어보고 싶어요.”
인터뷰가 진행된 9월 초 기준으로 <첫여름>은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6만여 명의 관객이 관람하는 큰 호응을 얻었고 지금도 상영 중이다. 허가영 동문은 앞으로 독립예술영화에만 갇혀 있지는 않으려 한다. <첫여름>을 통해 영화를 멀티플렉스에 걸어보고 직접 관객을 대면하면서, 꾸준히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사랑받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게 됐다고. 물론 상업적인 측면에서 흔들리기보다는 자신만의 중심을 잡고 자신의 작품 세계 속에 관객들을 초대하고 싶다. 또 한국 영화 생태계의 복원에도 일조하고 싶은 소망도 있다.
“한국 영화는 세대 교체가 되지 않았어요. 늘 만들어지는 비슷한 영화가 다수죠. 칸에서도 넥스트 봉준호나 이창동이 왜 안 나올까, 하는 질문이 있었어요. 코로나 이후 제작되는 영화가 확 줄었고, 기성 감독이나 스태프, 배우들에게 대부분 투자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젊은 감독들이 진입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에요. 개성도 옅어지고요. 기성품을 찍어내는 것과 같죠. 관객들이 더 극장을 안 가게 되고요. 삶의 더 다양한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영화를 관객들도 원한다고 생각해요. 예술적으로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중저예산 영화들이 받쳐줘야 관객들이 상업 영화도 찾거든요. 해외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기회를 잡기 어렵고, 그런데 저보다 훨씬 잘하는 연출자도 많거든요. 그래서 슬프기도 해요.”
거장들의 등용문이라 여겨지는 칸의 ‘라 시네프’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 허가영 감독에 대한 국내외의 기대가 크다. 하지만 그의 포부는 더 큰 성과를 내야 한다는 욕심보다는 젊은 여성 감독으로서 영화계의 변화, 그리고 언젠가 후배들을 위한 마중물을 내는 데 기여하고 싶다.
“꿈이라면, 여성 감독으로서 어떤 표상이 되면 좋겠어요. 저는 외로웠거든요. 훌륭한 여성 영화인들이 있지만 그들의 커리어가 남성 감독들처럼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거든요. 저도 남성 감독님들이 걸어왔던 길 못지 않게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을 하고 싶고, 그런 모습을 보며 후배들이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내 밥그릇보다는 내가 큰 감독이 되었을 때 후배들에게 나눠주고 선순환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가고 싶어요. 그렇게 영화 감독으로서의 생을 살고 싶어요.”
허가영 동문의 영화 <첫여름>을 보며 울고 웃었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반짝임’으로 표현한다. 허가영 동문의 세상을 향한 시선도 빛을 품었다. 소수의 이야기, 우리가 직면한 사회 문제들이 가득한 어둑한 세상 속에서 그것은 공감을 통해 희망을 전한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갇힌 세상 속에서 만드는 틈, 그 속에서 우리는 땅을 밟고 서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삶, 반짝이는 순간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