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리더들을 위한 성장 베이스캠프를 만들다
- 2025.05.21
우리나라는 고위직 여성 비율과 유사 업무 내 임금 성비 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성 격차 지수(Gender Gap Index)에서 2024년 146개국 중 94위를 기록했다. 국내 1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2023년 기준 6%에 불과해 OECD 국가에서 낮은 수준이다. 능력 있는 여성들의 고위직 비율이 점점 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지표에서 기대 이하의 수치를 보인다. 이런 환경에서 여성 리더들의 성장 기회를 마련하고 함께 성장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앞서 길을 내는 이들이 있다. HP코리아에서 기업영업본부를 총괄하고 있는 김미진 동문은 여성 임원이 드물었던 시절,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며 성취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이제 여성 리더들의 리더십에 대한 통찰을 공유하고 확산하는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고 더 높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김미진 동문은 어린 시절부터,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기기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던 만큼 공학적인 기술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당시 여성 비율이 20%였던 전산과학과(현 컴퓨터과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전산과학과는 총 55명이었어요. 그중 여학생은 12명, 20% 정도였죠. 그래서 남학우 중심의 문화로 적응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겠지만 그렇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함께 어울리면서 즐거운 경험들이 많았죠. 또 남학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했던 것들이 추후 사회생활에 남성 직원들과의 소통에도 큰 도움이 되기도 했죠. 여학우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과에서 12명의 여학우를 대표하는 그런 역할을 좀 했었지만 여성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어요. 남성이 많은 과임에도 연세에서 여성으로서 한계를 느끼거나 기회가 불공정하게 주어지는 일은 전혀 없었어요.”
어떤 일이든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성향 덕분에 김미진 동문은 무엇이든 거침없이 결정하곤 했다. 이런 그의 성향을 드러내는, 아직도 회자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름방학 때 학교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어요. 남자 선배들을 만났는데, 선배들이 군대에 간 자신들의 동기 면회를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는 거예요. 사실 전 얼굴도 모르는 선배였죠. 그런데 그 길로 같이 따라나섰어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집에 공중전화로 알리고 1박 2일로 다녀왔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용감했어요. 아직도 그 선배들에게 대단했다는 얘기를 듣곤 해요. (웃음)
학과 선후배, 동기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문화, 서로 믿으며 끈끈하게 쌓아온 관계들은 대학 생활 속에 스며들어, 오랫동안 미소 지을 수 있는 좋은 기억들을 만들었다.
졸업 후, 김미진 동문은 전공을 살려 중공업 분야의 국내 대기업 전산실로 입사했다. 그가 입사할 당시 신입 사원 500명 중 여성은 김미진 동문이 유일할 정도로 여성 진출이 드물었던 업종이었다.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적응해야 했다.
“신입사원 단체 교육 연수를 받고 전산실로 배치됐는데, 상명하복의 문화가 강했어요. 게다가 여직원은 무조건 유니폼을 입고 근무해야 했죠. 심지어 ‘미스 김’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남성 중심적인 문화였어요. 업무 진행에서도 정치적인 불합리함이 있었고요. 안되겠다 싶어 무턱대고 사표를 냈죠.”
성장의 한계를 느낀 그는 1년간의 국내 대기업 생활을 마치고 외국계 기업 HP코리아로 이직했다. ‘여성 직원’으로서 느끼는 부당함, 남성 중심적이고 수직적인 문화 안에서 체감한 성장의 한계를 경험했기에 보다 유연하고 여성에게 다양한 기회가 열려 있는 외국계 기업을 선택한 것이다.
“HP코리아로 이직 후, 업무에 대한 만족도를 넘어 기업 문화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높았어요. 당시 국내 기업들은 토요일에도 반나절 근무를 했는데, HP에는 주 5일 근무가 정착돼 있었죠. 무엇보다 창립 때부터 가족적인 문화가 있었어요. 트러스트 앤 리스펙트(Trust & Respect)가 중요 가치이기 때문에 폐쇄적인 국내 기업과는 차이가 많았죠. 수평적인 소통과 유연함도 좋았고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2017년, HP에서 삼성전자의 프린터 사업부 인수 작업을 하면서 국내 기업과 외국계 기업의 문화 차이를 다시 한번 느끼기도 했어요.”
HP코리아에서 기술 영업, 마케팅 홍보, 기업 영업 등 다양한 업무를 거쳐 30여 년간 경력을 쌓아온 김미진 동문. 현재 그는 기업 고객을 상대하는 기업 영업부의 리더로서, 고객사에 대한 영업활동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고객 니즈에 맞는 제품 및 솔루션 제안을 총괄하고 있다.
임원 승진은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꿈이지만 그로 통하는 문은 좁기만 하다. 더구나 ‘여성 임원’이라는 어려운 성취를 해 낸 김미진 동문. 그도 한때는 사원이었고 중간 관리자였다. 조직 내에서 단계별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리더십을 몸소 쌓아왔다.
“중간 관리자가 되기까지는 자신의 일을 굉장히 열심히 하면서 인정을 받아야 해요. 이후에는 스스로 전문성을 성장시키는 커리어로 갈지, 혹은 중간 관리자로서 팀원들과 협업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중간 관리자로 갈지 생각해 봐야 해요. 사실, 훌륭한 엔지니어라고 해도 꼭 좋은 조직을 만든다는 보장은 없거든요. 리더가 된다는 것은 내가 잘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결국 팀을 통해서 성과를 내야 해요. 사실 너무 어려운 일이죠. 팀원에게 시키는 것보다 내가 하는 게 더 빠를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내가 해버리면 조직이 성장을 못합니다. 어떻게 동기 부여를 해서 팀원들이 강점을 발휘해 원하는 성과를 내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죠. 결국 그것이 중간 관리자부터 가져야 할 리더십의 핵심이에요.”
사실 그 역시 리더로 성장하면서 리더십에 대한 고민을 했다. 특히 여성 리더로서 같은 고민을 공감하고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다. 여성 리더십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후 HP코리아 내 여성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후배 여성 팀원, 중간 관리자들의 성장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2012년에는 운명처럼 여성 리더들의 네트워크인 위민인이노베이션(Women in Innovation, 이하 WIN)을 만났다.
WIN은 리더들을 키우는 여성 리더들의 네트워크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여성들의 역할 확대를 미션으로 하는 사단법인이다. 국내 및 외국계 기업, 기타 법인 조직 등에 재직 중인 여성 임원들을 주축으로 구성됐다. 여성 리더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네트워킹, 리더십 아카데미와 차세대 리더 육성을 위한 컨퍼런스, 멘토링을 진행하고 있으며, 기업의 다양성 확대를 위한 양성평등 및 다양성 우수 기업 어워드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며 여성 리더들이 성장하면서 사회와 기업의 성장과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특히 돋보이는 활동은 리더로 성장하고자 하는 여성 중간 관리자들의 역량 강화를 돕는 컨퍼런스다. 여성들이 최고 리더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고민하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모색하는 자리로, 연 2회 개최한다. 컨퍼런스에서는 실질적으로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기조 강연과 함께 현재 기업에서 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선배들의 멘토링도 이뤄진다. 벌써 32회차의 컨퍼런스를 진행해 많은 여성 리더들의 성장을 돕는 든든한 서포터로 자리매김했다. 여성 리더 간의 연대의 장이자, 새로운 길을 내 온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멘토로서 미래 여성 리더들의 발판이 되고 그들의 자산이 또 다른 리더를 키울 수 있는 토양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김미진 동문은 자신의 생활이 집, 회사, WIN으로 이뤄져 있다고 할 만큼, WIN 활동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회사 임원으로서 누구보다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 시간을 쪼개 WIN 활동에 열정을 쏟고 있다. 그만큼 WIN의 활동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교류 이상의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를 버티게 하는 동력이다. 무엇보다 그가 실제로 맞닥뜨렸던 어려움,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방법들을 후배들에게 전할 수 있는 일이라 사명감이 더욱 크다.
“기업영업팀을 맡게 되고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어려운 점이 많아요. 그럴 때 옆에서 ‘괜찮아, 힘내’ 이런 말이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이들 덕분에 저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어요. 저 역시 후배들에게 그런 격려를 해주고요. 그래서 연대의식이 정말 중요하죠. 여성이 힘을 가지고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가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이탈자가 없게 해야 하고요. 같이 성장하고 있는 커리어 우먼들이 힘들어서 그만두지 않게 격려하며 함께 가야 하죠. 여성이기 때문에 같은 경험에 공감할 수 있고 실제로 와닿는 조언이나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이것이 WIN의 역할이기도 하죠.”
그를 비롯해 WIN에서 활동하는 여성 리더들은 모두 매일이 너무도 바쁜 기업의 임원들이 대부분이지만 열정을 다해 WIN 활동을 하고 있다. 특별한 사명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WIN은 여성 리더들의 성장을 위한 선순환의 장이 되고 있다.
“후배 여성 리더들이 성장해서 후배들을 위해 뭔가를 다시 기여하는 여성 리더로 성장하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어요. WIN에 참여하시는 많은 리더 분들은 이런 기여의 기회를 찾아 참여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그간 축적된 인사이트를 나누고 멘토링을 비롯해 WIN의 각 분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은 거의 재능기부를 하시는 거죠. 실제로 부장, 팀장급 여성재직자들의 신청을 받아 1년 동안 월 1회 모여 임원 승진을 위한 네트워킹과 리더십교육을 진행하는 ‘토요 마티네’ 프로그램이 있는데 시작한 지 벌써 15년이 됐어요. 그 과정에서 성장한 여성 중간 관리자분들이 이제 성장해서 임원이 되고 WIN의 회원이 되어 다시 멘토로 활동하고 계시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이런 선순환을 계속 이어가고자 해요.”
벌써 2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WIN은 이제 막 임원이 된 이들, 임원 커리어의 정점에 이른 이들, 또 퇴직한 이들이 함께 모여 있다. 특별한 점은 인생 2막을 준비하는 퇴직한 여성 리더들이 WIN에서 새로운 커리어 준비도 함께한다는 것. 조직 상의 변동이나 삶의 변화로 퇴직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은 커리어를 접기에 젊은 나이의 여성들. 이들은 WIN에서 에너지를 받아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여성 리더로서 각 단계에 계신 회원분들이 WIN에 오면 마음 편히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됐으면 해요. 새로운 등반을 위해 베이스캠프에서 준비하고 또 다른 길을 밟아가는 거죠. 예전에는 퇴직을 하면 끝이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기회들도 많아요. 이런 분들이 WIN에서 소모임을 만들어서 서로 격려하고 함께 새 도전을 준비하고 계세요.”
일과 육아의 병행은 일하는 여성들에게 가장 큰 고비 중 하나. 어느 순간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두 갈래 길과 마주한다. 일을 그만두고 양육에 전념하거나, 온 힘을 다해 일과 육아를 병행하지만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늘 품고 살거나. 이런 이들에게 김미진 동문은 완벽해지려는 것 대신, 도움을 요청하라고 조언한다.
“커리어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고학력을 갖추고 리더를 꿈꾸는 여성들일수록 완벽해지려는 강박이 있어요. 육아와 일을 다 완벽하게 하려고 합니다. 힘들다면 잠시 쉬어 가세요. 주변에 적극 도움을 청하세요.”
경력 단절은 더 이상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출산 문제로 이어지며 이미 우리 사회의 큰 사회적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김미진 동문은 경력 단절의 문제에서 동료들, 특히 남성 동료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여성이 육아 때문에 경력이 단절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회사에서 받는 배려가 특혜가 아닌 도와야 할 문제로 봐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요즘 육아휴직을 하는 남성 비중도 늘어가잖아요. 성별을 떠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일이에요. 그런 남성 우호자가 주변에 많이 있어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해요. 사실 요즘 MZ 세대 남성들은 많이 변화하고 있죠. 그들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의 미래는 정말 다른 세상이 될 거예요.”
이와 함께 김미진 동문은 단지 남성과 여성의 문제, 세대 간의 문제가 아닌 ‘다양성, 공정성, 포용성’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여성만의 권익을 위한 것도, 누군가에 대한 역차별도 아닌, 기업과 우리 사회가 지속 가능하게 발전해 나가기 위한 방향이다.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 회사 고위직에 있는 여성분들이 많아지고 있잖아요. 가정이나 시장에서도 여성의 결정 권한이 늘어났고요. 그런데 여성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여성 의사 결정권자의 니즈를 맞출 수 있겠어요.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각각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죠. 공정성은 기회의 공평함을 말해요. 예를 들어 어떤 포지션의 면접 자리가 났다고 하더라도 미리 내정자가 있고, 남성일 가능성이 높은 경우도 꽤 있어요. 경기장 펜스 바깥에서 누군가 경기를 보고 싶어 할 때 키 큰 사람은 그저 들여다보면 되지만 키가 작은 사람은 사다리가 필요해요. 공평하게 기회를 주는 것이 사다리인 셈이죠. 포용성은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잘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이고요.”
김미진 동문은 올해 WIN의 4대 회장으로 선임됐다. 누구보다 열정을 다해 활동해 온 만큼 과거의 값진 유산을 미래의 동력으로, 현재의 성취를 미래의 변화로 만들어 갈 예정이다.
“2027년 WIN이 20주년을 맞습니다. 아직 2년 정도 남긴 했지만 할 일이 많아요. 그간 저희가 세웠던 비전이 아직도 유효한지 다시 한번 검토를 하고 우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깊게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더욱 긍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부문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기 위해 이사회 워크숍도 준비하고 있고, 앞으로도 WIN의 회원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고 싶습니다. 20년간 이어온 WIN의 역사와 자산에 보다 큰 가치를 더하기 위해 저 혼자가 아니라 회원들과 함께 발전적으로 이어가고 싶습니다.”
김미진 동문은 여성 리더십의 확대는 결국 함께 성장하는 문화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 역시 함께 응원하고 격려와 인사이트를 나누며 현재의 자리에 온 증인이기에 앞으로도 ‘리더들을 키우는 여성 리더’로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여하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