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노이드 로봇의 오늘을 열고 미래를 이끌다
- 2025.04.19
2004년, 국내 최초로 탄생한 휴머노이드 로봇 ‘휴보’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국내 로봇 공학계와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만들고 로봇 공학 기술의 진보를 향한 새 길을 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한국에서, 세계 두 번째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이기에 전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휴보를 만든 이는 국내 로봇 기술의 선구자, ‘휴보 아빠’라 불리는 오준호 동문이다. 그의 손끝에서 상상이 현실이 됐다. 국내 최초 휴머노이드 로봇이 시작됐고, 현재의 혁신이 이뤄지고 있으며 미래 로봇의 새로운 가능성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오준호 동문은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남달랐다. 특히 그는 전자제품을 뜯어보고 조립하고, 새롭게 만드는 일에 흥미가 컸다. 라디오, 비행기, 로켓, 스팀 엔진 등 각종 기기들을 백과사전을 찾아보면서 이해하고 상상했던 것을 나름대로 설계해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따로 설계집을 만들 정도.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그를 ‘꼬마 박사’라 불렀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그가 가장 즐겨 찾은 곳도 온갖 기계 전자 부품들로 가득한 만물상들이 늘어서 있는 청계천이었다. 오준호 동문의 기계에 대한 호기심은 관심과 재미에 그치지 않고 실제 만들어 보며 느끼는 성취가 더해져 학과 선택과 진로로 이어졌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모든 기계 제품은 청계천에서 만들었을 거예요. 요즘으로 치면 전자상가라고 할까요. 청계천에 가면 미사일 빼고 다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웃음) 제겐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였죠. 틈만 나면 그 골목의 작은 공장들을 돌아다니며 기계를 보는 게 취미였어요. 기계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도 사실 그 재미와 흥미를 따라 간 것이죠.”
학과 선택이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호기심과 재미에서 시작됐다면, 연세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부친인 고 오기형 명예교수의 영향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연세 문화를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 어린 시절부터 그랬듯이 자유롭게 재미 있는 공부를 마음껏 하고 싶었고, 실제 그런 대학 생활을 경험했다.
“고등학교도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연세와 밀접한 느낌이 있기도 했고, 아버지도 연대 교수이셨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집도 신촌이었고요. 부모님께서는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가 스스로 역량을 발견해 나가는 것을 지지해 주셨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관심사에 대한 탐구를 이어왔죠. 자연스럽게 다른 곳은 생각하지 않고 연세에 입학하기로 결심했어요. 입학해 보니, 기대만큼 자유롭게 진리를 찾아가는 문화가 저와 잘 맞았죠.”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일단 ‘해 보는’ 그답게, 캠퍼스 생활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학과 공부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각종 기기를 해체하고 조립하고 만들면서 머릿속에 담아온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실험 과목들을 통해 책 속의 이론을 실제로 만들어 보는 강의들은 더없이 즐거웠다.
“대학생활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했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이나 공학이 너무 재미있어 대학 3학년부터는 대학원 선배들 실험을 도우면서 대학원생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제가 청계천 박사였기 때문에 어떤 부품은 어디서 구할 수 있고 어떻게 만들면 되는지, 쉽게 알 수 있었거든요. 기계가 고장나면 고쳐주기도 하면서 저도 정말 많이 배웠어요. 유학을 다녀오면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것들은 다 헛된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대학시절 모든 걸 다 배웠어요. 후에 미국으로 갔을 때 연세에서 배운 것이 기반이 됐기 때문에 더 성장할 수 있었죠.”
그렇다고 오준호 동문이 오직 도서관이나 실험실 안 공부에만 매몰됐던 것은 아니다. 그의 다양한 호기심과 흥미는 음악, 그림, 봉사 등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영역의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그림 동아리 ‘화우회’, 기독교 동아리 ‘SCA(Students Christian Association)’, 교회 성가대, 야학 교사 등 틈틈이 경험의 폭을 넓혔다.
“대학생활 내내 너무 바빴어요. 그런데 좋아하는 게 많으니까 일단 해 봐야죠! 아직도 가끔씩 생각나요. 야학 하다 생긴 일, 화우회에서 그림 그리고 선배들을 따라다녔던 일, 매년 음악회를 개최했던 일, 볼룸 댄스 파티 등 대학생활동안 저처럼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해 본 사람이 있을까 싶어요. 이보다 완벽한 대학생활은 없다고 자부해요. (웃음)”
오준호 동문의 배움에 대한 의지는 자연스레 대학원 진학으로 이어졌고, 졸업 후 국책연구소인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노심설계 업무를 맡으며 유학을 결심했다. 재학 시절 관심을 뒀던 자동제어 분야를 공부하고 실제 경험하면서 자동제어 시스템에 대해 더 깊게 탐구하고 싶었다.
“지도 교수님이 박영필 교수님이셨는데,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처음 부임을 하셨죠. 그때는 신학문의 전도사와 같았죠.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유한요소법(FEM) 강의도 하시고, 자동제어 과목을 새로운 관점으로 강의하시는데, 너무 인상 깊었어요. ‘바로 저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 교수님께서 생체공학 전공을 하셨었고, 저도 흥미가 생겨 대학원에서 관련 전공을 하며 이것저것 교수님을 도왔죠. 기계를 만드는 작업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시스템 해석 쪽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유학을 가서 자동제어 시스템 관련 연구를 하게 됐어요. 자동제어에 대한 관심이 CNC 공작기계나 로봇 계통과 연계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당시 유학을 가는 절차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쉽지 않았다. 소형 개인 컴퓨터도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 유학할 학교 정보를 찾기 위해서는 풀브라이트 센터나 미국 홍보관 등에 찾아가 물어야 했고, 지원서를 얻는 것도 직접 편지를 보내 요청해야 했다.
“요즘은 온라인으로 입학 지원을 하지만, 그때는 가고 싶은 대학이 있으면 학교에 편지를 써서 지원서를 요청해야 했어요. 한 장만 보내주는 지원서를 망칠까봐 연습해서 조심조심 먹지를 대고 손으로 썼죠. (웃음) 우편으로 보내면 합격증이 오기까지 세 네 달을 또 기다려야 해요. 그렇게 지원해서 유학을 가게 됐어요. 하지만 막상 유학을 가도 한 학기가 지나면 자격 시험을 봐서 일정 수의 학생을 떨어뜨려요.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저는 한 번 만에 붙었고, 자동제어 시스템 분야에서 유명한 마사요시 토미츠카(Masayoshi Tomizuka) 교수팀에서 함께 연구할 수 있었어요.”
첨단 학문이 연구되고 전 세계의 인재들, 명망 있는 교수진들이 모인 명문 대학에서도 연세에서의 배움이 탄탄했기 때문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고, 오준호 동문은 말한다.
“유학 시절에 굴곡이나 어려움은 없었어요. 그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이론, 학문들을 만났지만 내가 몰랐던 것이라고 해서 고민한 적은 없어요.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거든요. 오히려 연세에서 열심히, 잘 배웠기 때문에 더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어요. 진리를 깨닫고 정말 궁금했던 근원적인 문제들이 풀렸던 것은 대학교 시절이죠. 유학 시절은 새로운 지식이 더해지고 채워지는 과정이었죠.”
그렇게 자동제어 시스템 관련 박사과정 및 박사후 연구원(Post Doctor)을 마치고 1985년, 4년 만에 귀국해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카이스트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그의 ‘청계천 정신’은 바래지 않았다. 학생들과 함께 청계천 구석구석을 다니며 실제적인 배움의 현장을 소개했다. 그의 여정이 그랬던 것처럼, 공학의 아이디어는 ‘손끝’에서 나온다는 것을 현장에서 느끼고 배울 수 있게 했다.
“내가 직접 만져보고 감정을 가질 때 창의력이 나올 수 있어요. 이론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공학이 아니라 사이언스라고 할 수 있죠. 이론을 바탕으로 상상하는 일도 좋지만 그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진정한 공학자들은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 공학적인 직감은 손끝에서부터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이 혁신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이런 생각을 늘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결국 ‘손끝’을 강조하는 오준호 동문의 철학은 삶에 이롭고 실재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공학의 본질에 이른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주저하지 않고 만들어 보는 공학자로서의 철학을 가진 그이기에 국내 최초 이족보행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에 주저 없이 도전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것이 있으면 구입하는 것보다 꼭 내 방식대로 만들어 보며 구현하고 싶었어요. 사실 제가 전문적으로 로봇 분야만 전공하거나 연구하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로봇에 적용되는 시스템을 연구했잖아요. 모터, 제어기,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이 다 연결, 통합돼서 어떻게 안정화되느냐의 한 형태가 공작기계이고, 또 로봇이에요. 카이스트에서 기계 제어 연구실을 운영하면서 여러 실험들을 많이 했어요. 특이하게 움직이는 장치, 거꾸로 세우는 장치, 동작 센싱 방식, 무선 자동 방식으로 날아가는 무인 헬기 등 다양했죠. 그런데 어느 날, 일본에서 ‘아시모’라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세계 최초로 공개된 거예요. 저 로봇이 가능하네, 신기하네 했다가 어느 순간, 나도 그냥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싶더라고요. 기술 요소를 분석해 보니 힘을 감지하는 센서, 관성 센서, 센서 제어 기술, 모터 제어 기술 등 평소에 잘 알고, 가지고 놀던 기술에서 벗어나는 게 없더라고요. 이 기술들을 통합하면 휴머노이드 로봇이 되는 것이었죠.”
2004년 오준호 동문의 연구팀은 세계에서 두 번째, 국내 최초의 휴머노이드 로봇 ‘휴보(Hubo)’ 개발에 성공했다. 사실 처음 그가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을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회의적이었다. 한국형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겠다며 관계기관 등에 다양한 제안과 연구비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단기간에 적은 예산으로는 수십 년에 걸쳐 수백 억을 들여 개발한 아시모 수준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 방법을 찾아내고야마는 그는 당시 동료 교수들의 연구비를 십시일반 모아 초기 개발에 나섰고, 초기 모델에서 가능성을 본 학교와 정부의 지원이 더해져, 2년 만에 단 10억 원의 연구비로 개발에 성공했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가 예측하지 못한 놀라운 성과였다. 아시모에 뒤지지 않고 다섯 손가락을 움직이고 음성 인식 능력도 갖춘 휴보의 등장에 세계 로봇 공학계도 들썩였다.
“2년 만에 아시모 수준의 로봇을 한국에서 개발했다니 일본에서 더 놀랐죠. 로봇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날에는 여기저기서 구경하러 왔어요. 그때 휴보 개발 스펙을 다 공개했죠. 비밀스러울 것이 없어요. 내가 없는 기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있는 기술을 시스템으로 통합한 것이잖아요. 각 기술 요소가 적용된 센서, 모터 드라이브, 배터리 시스템을 다 직접 만들었다니 다들 놀랐죠. 이후 휴보의 스펙을 공개했고 레퍼런스가 돼서 휴머노이드 로봇을 많이 만들기 시작했죠.”
오준호 동문의 휴보 개발은 국내 휴머노이드 로봇의 태동, 그리고 로봇 공학계의 새 이정표가 세워진 것이었다. 이후 휴보는 더욱 발전해 갔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달리기에 성공한 휴보2는 미국, 싱가폴 등 해외로 총 8대가 판매됐다. 이를 계기로 오준호 동문은 휴보랩 연구진과 실험실 창업으로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시작했다. 창업 이후에도 휴머노이드 로봇에 대한 연구 개발은 이어졌다. DRC휴보는 2015년 미국 국방 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주최한 재난 대응 로봇 대회에 참가해 우승했다.
레인보우로보틱스는 휴보 첫 개발 단계부터 쌓아온 신뢰와 연대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로봇 기업으로 성장했다. 세계 최초로 상업화한 휴머노이드 로봇 플랫폼을 비롯해 산업 자동화 로봇, 협동 로봇, 정밀 로봇 제어 기술을 활용한 천체 정밀 관측 장비 등의 제품을 개발하며 지속 성장하고 있다. 오준호 동문은 2016년 호암상을 비롯해 2016년 과학기술훈장 창조상, 2022 한국과학(중점)공학상을 수상하는 등 우리나라 로봇 공학계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각종 자동화 로봇을 만난다. 식당에서 서빙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고, 요리를 한다. 공장이나 물류산업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사람과 같은 형태의 모습을 갖추고, 사람과 같은 감각을 느끼고 분석하는, 마치 사람의 지능을 가진 듯한 휴머노이드 로봇은 아직 먼 이야기 같다. 우리나라 로봇 공학 기술을 진일보시키고 개척해온 오준호 동문이 바라보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현재는 어떨까.
“최초로 휴머노이드 로봇이 선보인 후 이제 20년이 지났어요. 2015년 미국 국방 고등연구계획국(DARPA) 대회에 참여했던 공학자들이 실험하던 것들이 현재 실현되고 있죠. 당시 작동은 하지만 실제로 사용하기는 멀었구나 라는 생각들로 이후 연구가 시들해졌거든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휴머노이드 로봇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커졌어요. 특히 챗GPT와 같이 사람의 언어를 배우고 따라하는 로지컬 AI(Logical AI) 기술에서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는 물리적 AI(Physical AI) 기술로의 발전 가능성이 보이고 실제 사례가 많아지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밥 먹을 시간이라고 말하는 대신, 밥을 해 주는 것이죠. 과거와 달리 AI라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결합하면서 휴머노이드 로봇에 대한 관점도 달라지고 전통적으로 연구하던 사람들도 진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어요. 시들했던 휴머노이드 로봇 연구가 다시 탄력을 받고 본격화되는 것 같아요.”
AI와 결합하며 휴머노이드 로봇이 큰 변화를 겪으며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전하는 오준호 동문.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결코 손쉽게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또한 지속 발전해 나가더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을 언제쯤 만날 수 있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늘 그렇듯, 우리 삶의 방식과 기술이 빠르게 변해가며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 다리, 눈만 제대로 갖추면 운전, 빨래, 요리, 못 박기 등 대부분의 일을 다 할 수 있어요. 그것을 완전체로 구현하는 형태가 휴머노이드이기 때문에 범용 휴머노이드라고도 하죠. 그러나 사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거꾸로 말하면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어요. 사실 못을 박는 일에는 총알을 쏘듯 못을 박는 전용 로봇이 더 효율적이죠. 휴머노이드 로봇은 손가락으로 망치를 들고 뚝딱거리면서 못을 박잖아요. 답답하죠. 그래서 높은 수준의 범용 로봇을 만들기란 도전적이고 어렵죠. 때문에 그만큼 가치가 있고, 만약 구현되는 시점이 오면 그 파급력은 굉장히 클 거예요. 하지만 언제쯤 완성형이 등장할지는 예측할 수 없어요. 휴머노이드 로봇의 딜레마이기도 한데, 휴머노이드 로봇은 한두가지 성능으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힘, 크기 등 스펙을 가져야 할지 알 수 없어요. 그냥 했으면 좋겠다는 희망만 있을 뿐이죠. 그래서 휴머노이드 로봇을 일상에서 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하지만 현재 일어나는 기술 혁신의 속도를 감안하면 그렇게 요원한 일도 아니죠.”
휴머노이드 로봇이 일상에서 사람의 다양한 일을 대체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는 그 한계도 명확하게 제시한다. 인간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은 명확하다. ‘자아(ego)’의 유무가 인간과 휴머노이드 로봇을 가르는 분명한 경계이기 때문이다.
“사실 휴머노이드 로봇에 인공지능이 만나 진보하더라도 휴머노이드 로봇에 자아가 탑재될 수는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인공지능이라는 것도 지능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능의 주체는 ‘자아’예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생각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아가 존재를 입증하는 것인데 인공지능은 룰에 따른 반응을 학습해서 미션에 대한 결과값, 즉 정답만 보여주죠. 사람의 지능과 유사한 결과값일 뿐이지 지능은 아니기 때문에 절대 인간을 대체할 수 없어요.”
최근 레인보우로보틱스가 삼성전자의 자회사로 편입되며, 오준호 동문은 레인보우로보틱스 대표이사에서 퇴임하고 삼성의 미래 로봇 사업의 방향성을 책임지는 미래로봇추진단의 단장으로 취임했다. 말 그대로 미래 로봇개발의 방향성을 제시하며 미래를 주도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할 예정이다. 그의 취임은 테슬라나, 엔비디아 등 글로벌 기업들이 미래 기술 확보를 위해 로봇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투자를 확대하는 흐름 속에서 삼성이 AI 기술에 첨단 로봇 기술을 접목한 지능형 첨단 휴머노이드 개발에 적극 뛰어들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오준호 동문의 로봇 공학과 산업에 대한 통찰력이 어떻게 삼성과 시너지를 낼지 학계와 산업계 모두의 기대감이 크다. 그만큼 그의 어깨도 무겁다.
“삼성이 우리나라 산업을 이끄는 대표 역할을 하는 만큼 어깨가 굉장히 무겁죠. 하지만 자유롭게 미래 로봇산업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제시하며 추진해 볼 수 있는 기회인 만큼,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이와 함께 오준호 동문은 학계의 선도자로서 평소 관심을 가지는 사회적 책임 활동도 지속할 예정이다. 어린 시절부터 사회적 책임과 기여 활동을 몸소 보여준 부모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가족의 문화이자 사명감이다. 실제 그가 카이스트 실험실 창업기업 1호의 성공 사례를 쓰면서 학교에 기부했던 주식은 50여 억원에 이른다. 이것은 대학에 지원된 연구비가 창업으로 이어지고, 다시 대학으로 환원되는 선순환 구조를 실현한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학계 연구 발전을 위해 학회에 기부도 꾸준히 나서고 있다. 각종 강연을 통한 지식 공유 또한 그가 잊지 않는 사명이다.
“일부러 실천한다기보다는 부모님께서 워낙 국가와 사회에 대한 사명감과 철학을 생활 속에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제게는 당연한 것 같아요. 당시는 학생 운동을 많이 하던 시절이라 휴교령이 자주 있었고 그때 아버지께서 휴교 기간에도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을 집에 불러 가르치셨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저 역시 사회적 책임 활동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준호 동문은 자신을 틀 안에 가두지 않는다. 만들기를 좋아하는 꿈꾸는 꼬마 박사, 청계천을 누비는 공학도, 국내 최초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자이자 새로운 길을 내는 학자와 교수, 유망기업의 대표, 이제 산업을 혁신할 미래 로봇사업의 방향을 제시하는 수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여정은 고정된 한계를 짓지 않았기에 이어지고, 확장되어 온 여정이다. 자유롭고 유연했기 때문에 자신의 흥미와 관심에 충실한 삶을 살았고 목표에 점을 찍고 멈추기보다는 모든 순간순간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래서 쉽사리 예측하기 어려운 휴머노이드 로봇의 미래를 그는 어떻게 실현해 낼지, 더욱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