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쏟아지면, 우리는 다시 청춘이 된다
- 2026.08.24
왼쪽부터 이혁수(기타/기계공학 88/하리보코리아 대표), 김소연(키보드/피아노 87/전 뮤지컬 예술감독), 오종훈(드럼/법학 87/전 SK에너지 대표), 황재혁(보컬/법학 87/K Car 본부장), 이준휘(베이스/경영학 20/현 소나기 회장), 길용준(베이스/토목공학 87/특허법인 주원 대표변리사)
토요일 오후, 역삼동 모처의 연습실에서 기타와 베이스, 드럼과 키보드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연주하는 이들의 학번은 1987년과 1988년. 대학을 졸업한 지 어느덧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악기를 들고 합주를 시작하자 표정은 금세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이들이 처음 ‘소나기’라는 이름 아래 음악을 시작한 지도 올해로 40년이다.
1986년 탄생한 연세대학교 록밴드 ‘소나기’는 연고전과 아카라카의 응원 무대를 지켜온 밴드이자, 자신들만의 음악을 만들어온 연세의 대표적인 학생 음악단체다. 1990년과 2001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 1995년 은상 등을 수상하며 대학 밴드 문화에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고, 수많은 동문이 소나기를 거쳐 음악과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로 진출했다.
소나기의 초창기를 함께했던 다섯 동문과 현재 소나기를 이끌고 있는 이준휘 회장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의 음악을 카세트테이프로 되감아가며 연주하던 1980년대와, 유튜브와 디지털 장비로 음악을 만들고 보컬로이드까지 무대에 올리는 2020년대. 음악도, 연습 방법도, 대학생활도 달라졌지만 두 세대를 잇는 한 가지는 선명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사람들과 함께 연주하는 즐거움이다.
소나기의 공식적인 시작은 1986년 10월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조금 더 오래됐다. 당시 연고전 응원음악은 음악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된 ‘취주악반’과 기타·베이스·드럼·키보드 등을 연주하던 전자음악 파트가 함께 담당했다. 이 전자음악 파트의 선배 세대에는 훗날 ‘해야’로 잘 알려진 그룹 마그마의 멤버들도 있었다.
록과 메탈을 좋아해 모인 학생들에게 응원곡만 연주하는 활동은 어딘가 아쉬웠다. 결국 “우리도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취주악반에서 독립해 ‘연세대학교 전자음악회 소나기’를 정식 등록했다. 87학번 회장을 맡고 있는 황재혁 동문은 소나기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자음악 파트에 들어온 사람들은 당시 유행하던 록이나 메탈을 하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응원음악만 하고 있었죠. 그래서 따로 만들어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보자고 한 겁니다.”
‘소나기’라는 이름에도 당시 구성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질학과와 천문대기학과 선배들이 많아 ‘한랭전선’ 등 자연현상과 관련한 이름들이 후보에 올랐고, 그중 간결하고 강렬한 ‘소나기’가 선택됐다.
초기 멤버들이 즐겨 연주한 음악은 당시 청년들이 열광했던 하드록과 헤비메탈이었다. 레드 제플린, 퀸, 딥 퍼플 같은 밴드가 자연스럽게 교과서가 됐다. 그러나 소나기의 음악을 하나의 장르로 규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답이 분명했다.
“소나기 안에서도 록을 좋아하는 사람,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 부드러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다 있었어요. 졸업하고 나면 취향이 맞는 선후배들끼리 또 새로운 밴드를 만들고요. ‘소나기는 어떤 음악을 추구한다’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말인 것 같아요.”
40년 뒤 소나기의 음악이 훨씬 다양해졌어도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40년의 시간은 음악을 배우고 연주하는 방법부터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요즘에는 듣고 싶은 곡을 검색하면 원곡은 물론 악기별 연주 영상과 악보까지 손쉽게 찾을 수 있지만, 1980년대에는 한 곡을 익히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악보가 거의 없어 각자 카세트테이프를 반복해서 들으며 자신의 파트를 직접 ‘따야’ 했다. 충분히 듣고 연습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각자가 익혀온 파트를 실제 합주에서 맞추며 곡을 완성해 갔다.
“악보가 없으니까 자기 파트는 자기가 다 따야 했어요. 테이프를 계속 돌려 들으면서요. 지금은 유튜브로 충분히 듣고 백 번 연습한 다음 만날 수 있잖아요. 요즘 다시 연주하면서 정말 연습하기 좋은 세상이 됐다고 느낍니다.” 김소연 동문이 웃으며 말했다.
연습 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지만 무대에 설 기회는 많았다. 교내 공연뿐 아니라 다른 대학교 축제와 호텔, 미8군 무대까지 외부 초청공연을 다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는 경원대학교 축제 때 초청받았던 일을 꼽았다. 교내에서와 달리 관객들의 호응이 대단히 뜨거웠다고. 들국화와 같은 무대에 선 것을 계기로 전인권과 교류하기도 했다. 1989년 ‘아카라카를 온누리에’에서는 당시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무한궤도’와 같은 무대에도 섰다. 홈그라운드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연주했고, 객석에서 쏟아진 뜨거운 박수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소나기의 이름이 대학 밖으로 널리 알려진 데에는 대학가요제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 ‘누군가’로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데 이어 1995년 ‘엇갈림 속에서’로 은상을 수상했고, 2001년에는 ‘청춘가’로 다시 대상을 거머쥐었다. 초창기 멤버들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창립 초기라 이름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후배들의 대학가요제 수상을 계기로 ‘소나기’는 대학 밴드를 대표하는 이름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1987학번이 대학에 들어온 해는 한국 사회의 변화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캠퍼스 역시 시대의 긴장과 에너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소나기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음악단체는 아니었다. 구성원들의 생각과 성향도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연세 캠퍼스에서 밴드 악기를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학생단체가 많지 않았던 만큼, 학생사회의 요청으로 운동가요 녹음이나 학생회 관련 행사에 참여했던 경험도 있었다. 동시에 연고전 뒤풀이에서는 영어 가사의 록 음악을 연주하는 소나기와 당시 사회 분위기가 묘하게 충돌하는 장면도 있었다.
이들에게 음악은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청춘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시대 한가운데에서 각자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한 밴드에 모여 음악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소나기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대학을 졸업한 뒤 초창기 멤버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음악을 완전히 내려놓은 이는 많지 않았다. 직장인이 된 뒤에도 다른 밴드에서 연주하거나 공연과 뮤지컬 등 각자의 방식으로 음악과의 인연을 이어왔다.
김소연 동문은 뮤지컬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며 <캣츠>, <레미제라블> 등 여러 작품과 창작 뮤지컬 작업에 참여했다. 다른 멤버들 역시 직업과 생활의 틈에서 음악을 놓지 않았다. 지금 함께 연주하는 것은 40년 만의 ‘재결합’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온 음악이 다시 한곳에서 만난 결과에 가깝다.
최근 초창기 멤버들은 ‘젤리 무어(Jelly Moore)’라는 밴드를 꾸렸다.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Gary Moore)와 젤리를 결합한 유쾌한 이름이다. 한 달에 한 번가량 모여 연습하고, 공연을 앞두고는 더 자주 합을 맞춘다.
이혁수 동문에게 다시 함께 음악을 한다는 것은 청춘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87학번 형, 누나들은 개성이 정말 강했어요. 해프닝도 많았고요.(웃음)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때 같이 지냈던 기억이 참 좋은 거예요. 다시 만나 음악을 하고 옛날 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즐겁습니다. 자기의 젊은 시절을 함께 기억해 주고, 그 추억을 꺼내 이야기할 사람들이 있다는 건 큰 복인 것 같아요. 아마 더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이렇게 만나 웃고 떠들겠죠.”
길용준 동문은 자신에게 소나기가 어떤 의미인지 묻는 질문에 ‘준거집단’이라는 단어를 골랐다.
“살면서 여러 집단에 속해 봤지만 이 사람들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제가 속했던 집단 중 가장 애정이 가는 곳이라고 할까요.”
소나기는 졸업과 함께 끝나는 동아리가 아니라, 음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의 시간을 이어주는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현재 소나기는 매년 1학년을 대상으로 기타, 키보드, 드럼, 베이스와 보컬을 선발한다. 새로 들어온 구성원들은 2학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연고전과 아카라카 등 학교 주요 행사에 참여한다. 이후에는 자신이 원하는 팀을 꾸려 공연하거나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이준휘 학생은 현재 소나기의 활동을 두 축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학교 행사를 위한 응원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구성원들이 스스로 원하는 음악을 탐구하는 활동이다.
“응원 행사는 해야 할 양이 정해져 있어서 물리적인 시간은 많이 듭니다. 하지만 저희가 계속 늘려가려고 하는 건 음악적인 활동이에요. 팀을 꾸려 공연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작곡하는 친구들도 있고, 작곡 모임도 있어요. 여러 방식으로 자기 음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응원곡은 오랜 시간 같은 연주를 안정적으로 이어가야 하는 만큼 선배가 후배에게 정해진 연주법을 전하는 ‘도제식’ 전통을 따른다. 반면 자체 공연에서는 선곡과 편곡 모두 자유롭다. 최신 한국 밴드 음악부터 하드록과 메탈, 서브컬처와 보컬로이드 음악까지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
초창기 멤버들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위해 독립했다면, 오늘날의 소나기 역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각자의 음악을 찾는다는 점에서 같은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이준휘 학생에게 소나기 활동의 시작은 선배들과 조금 달랐다. 2020년에 입학한 ‘코로나 학번’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대면 공연과 응원 행사가 사라졌고, 현역 시절 대부분의 활동을 영상으로 경험해야 했다.
원래 소나기에는 구성원끼리 합주 결과를 발표하고 피드백을 나누는 작은 ‘발표회’가 있었다. 코로나19로 모이기 어려워지면서 이를 영상으로 대체했다.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며 음원을 믹싱했고, 전문 제작자를 따로 두기보다는 악기를 연주하던 학생들이 필요한 기술까지 스스로 배웠다. 이 경험은 이후 소나기의 온라인 아카이빙과 콘텐츠 제작으로 이어졌다. 거리두기가 풀린 뒤 처음 만난 대규모 응원 무대는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현역 때에는 계속 영상을 찍어 올리는 활동을 했어요. 2022년 군대에서 처음 휴가를 나왔을 때 마침 아카라카가 다시 열렸는데,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노래하고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처음 경험했죠. 그때 정말 좋았어요.”
2024년에는 소나기 멤버 다섯 명과 함께 부활한 대학가요제에도 도전했다. 경연 중반에서 탈락했지만 오히려 결과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무대 자체를 즐길 수 있었던 경험으로 기억한다. 과거 대학가요제 영광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지금 세대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새로운 무대를 찾아 나서고 있다.
(사진 - 소나기 공식 유튜브 채널 @yonsei_sonagi)
시대가 달라지면서 대학생활의 모습도 크게 변했다. 이준휘 학생이 꼽는 현재 소나기의 가장 현실적인 어려움은 공간이나 장비가 아닌 ‘시간’이다. 학업과 취업 준비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긴 연습과 공연 준비에 충분한 시간을 쏟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그는 40년 전 선배들에게서 이어받고 싶은 것으로 ‘순수한 열정’을 꼽았다.
“선배님들 때는 지금보다 음악을 접할 정보도 부족했고 악기도 훨씬 비쌌고, 인프라도 부족했잖아요. 그런데도 그냥 음악이 좋고 합주하는 게 좋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셨고, 지금도 계속 음악을 하고 계세요. 그런 순수한 열정은 저희가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선배들의 바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황재혁 동문은 “우선 안 망하고 계속했으면 좋겠다”며 웃었지만, 그 안에는 소나기가 앞으로도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마음껏 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기를 바라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기왕 음악을 한다면 잘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연주를 잘해야 나 자신도 더 즐길 수 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연주했을 때 듣는 사람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우리 때는 이랬으니 너희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준휘 학생의 표현처럼 만나면 지시보다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문서로 정해지지 않은 소나기의 문화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동문회에서 운영 중인 연습실에는 오래전 학생들이 써 내려간 ‘날적이’와 음악 자료도 일부 남아 있다.
초창기 멤버들에게 소나기 활동에서 느낀 ‘연세다움’을 묻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자유’로 향했다. 학교 응원음악이라는 분명한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늘 그 밖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찾았다. 황재혁 동문은 당시 소나기 구성원들을 “자기 개성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회상한다. 정해진 틀보다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 하고 싶은 음악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실제로 대학 전공을 내려놓고 음악을 직업으로 택한 동문도 적지 않았다. 40년의 세월을 지나, 이준휘 학생에게서도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저희는 응원곡을 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의무가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해내면서도 ‘그 밖에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하는 것 같아요. 주어진 것을 수행하면서 자기만의 것을 또 찾으려고 하는 데서 자유라는 키워드가 떠오릅니다.”
1980년대에는 카세트테이프를 되감으며 록을 연주했고, 2020년대에는 유튜브로 음악을 익혀 보컬로이드를 무대에 올린다. 세대에 따라 음악은 변하고 사람도 달라진다. 그러나 소나기가 어떤 음악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의 답으로 정하지 않는 자유로움과, 좋아하는 것을 사람들과 함께 끝까지 해보고 싶은 마음은 40년 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초창기 멤버들에게 앞으로 소나기가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느냐고 묻자 답은 간결했다.
“연세를 상징하는 록밴드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40년 동안 우리의 음악을 해왔고, 대학가요제에서도 성과를 냈고, 동시에 연고전 응원음악도 꾸준히 맡아왔으니까요. 연세를 대표하는 록밴드, 그거면 됩니다.”
소나기는 오늘도 이어진다. 연고전의 함성 뒤에서 연주하는 밴드로, 자신만의 음악을 찾아가는 대학생들의 실험실로, 그리고 수십 년이 흘러 다시 악기를 들었을 때 한순간에 청춘으로 돌아갈 수 있는 오래된 친구들의 이름으로. 한바탕 세차게 쏟아졌다가 그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운 비. 어쩌면 ‘소나기’라는 이름만큼 이들의 40년을 잘 설명하는 말도 없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