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험으로 연단된 윤동주의 시

정명교 전 국어국문학과 교수
  • 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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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기념사업회는 지난 2월 14일,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선생 서거 80주기를 맞아 추모식을 개최한 데 이어, 3월 7일에는 핀슨관에서 송몽규 선생 서거 80주기 헌화식을 진행했다.

 

동갑내기 고종사촌지간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용정에서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함께 다녔으며,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함께 입학해 문학에 대한 뜻을 같이 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 “일본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며 일본 유학을 결행해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에, 윤동주는 도쿄의 릿쿄대에 입학했다가 이후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로 옮겨 송몽규와 재회했다. 두 사람은 1943년 7월 ‘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체포돼 각각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윤동주는 미처 생을 다 꽃 피우지도 못하고 스물아홉의 나이로 ‘남의 나라’ 일본 땅에서 숨을 거뒀다.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이었다. 윤동주가 절명한 지 19일 후인 3월 7일, 송몽규도 세상을 떠났다. 송몽규의 친족이자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 선생은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라고 언급한 바 있다.

 

우리 대학교는 1947년 윤동주 추모제를 시작으로 1968년 최초의 윤동주 시비를 캠퍼스에 세우는 등 동문 시인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2000년 윤동주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고, 2013년에는 시인의 유족으로부터 윤동주의 유품 전체를 기증받았다. 2019년 윤동주문학동산을 조성하고, 2020년 연희전문 시절 생활했던 기숙사인 핀슨관에 윤동주기념관을 건립했다. 윤동주기념관에는 윤동주의 육필원고 100여 점과 지인들의 유품 80여 점, 시인의 체온이 깃든 책과 초판본 시집을 비롯해서 유족들이 해외 각지와 주고받은 서신, 국내외에서 활발히 생성된 자료들이 소장돼 있어 시간을 뛰어넘어 윤동주의 정신을 만나게 한다.

 

정명교 전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2017년 <윤동주를 느끼는 세 가지 차원>이라는 기고글을 통해 ‘사건으로서의 윤동주’, ‘사람으로서의 윤동주’를 넘어 이제 ‘텍스트로서의 윤동주’로 넘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피력하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추앙받는 윤동주 시인이지만 정작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연구가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의 주변인을 비롯한 수많은 동시대인들의 삶, 그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던 작품들을 상관관계 속에서 이해하게 될 때 윤동주 문학은 인간 정신의 거대한 진화적 운동 속에서 살아 숨쉬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윤동주의 시를 잘,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까. 윤동주의 시와 산문을 다 읽어 봤다고 해도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의미로 글을 썼는지 감히 다 안다고 할 수 없을 터다. ‘텍스트로서의 윤동주’를 만나보기 위한 첫걸음으로 재작년 8월 퇴임한 정명교 전 국어국문학과 교수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학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평론으로 등단(1979)했던 정 교수는 한국 현대시, 정신분석 비평, 세계문학과 한국문학 간의 상호관련성 연구, 디지털 문명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디지털 휴머니티, 인지이론의 인문학적 접근 등을 주로 연구해 왔다.

 


Q. 윤동주, 송몽규가 북간도에서 멀리 경성의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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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다시피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생기긴 했지만 조선인들을 위한 대학은 아니었죠. 조선인들이 스스로 자기를 일깨울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해야 되겠다는 취지로 만든 게 연희전문이잖아요. 나중에 보성전문도 생겼지만, 연희전문은 기독교 학교라는 점이 특별했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특히 억압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 슬픔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를 회복하고 강성해지는 주제를 담고 있어요. 유대인의 역사가 그렇고, 죽임당했지만 부활하신 예수의 생애가 그렇죠.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높은 곳에 이르는 일종의 과정을 밟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억압받고 있던 식민지 조선인들의 민족주의와 딱 맞아떨어졌던 것이죠. 

 

또 종교를 앞세우고 있는 학교는 일종의 보편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당국이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는 측면도 있었을 거예요. 당시 연희전문은 겉으로는 일제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황국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지키는 듯 보였지만 안으로는 한글도 자유롭게 쓸 수 있었고, 학문의 개방성과 다양성 같은 것들이 허용되고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한국인들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개발하는 노력이 있었죠. 최현배, 김윤경 선생을 필두로 한글문법 확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분들이 연희전문에서 일하셨단 말이죠. 또 근대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민족주의를 해야 된다고 주창한 정인보 선생도 계셨고요. 그런 점에서 연희전문은 한반도 내에서 자기를 일깨우고 민족의식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고 할 수 있어요.

 

송몽규나 윤동주 모두 기독교 집안이었고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란 말이죠. 기독교 정신에 깊이 몸 담고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연희전문에 와서 말 그대로 윤동주는 자기식의 성찰적인 공부를 잘 해서 훌륭한 시들을 남겼던 것이죠.

 


Q. 윤동주 시인은 독특하게 시를 쓴 날짜를 일일이 다 기록했잖아요. 어떤 취지였을까요? 그 기록이 오늘날 윤동주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윤동주가 왜 날짜를 꼬박꼬박 남겼는가 하면, 시를 공부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공부 과정의 기록이었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자기가 시인이 되리라는 명확한 확신이 없었던 때란 말이죠. 윤동주는 정식 등단을 한 적이 없어요. 같은 시를 부분적으로 고쳐 쓴 것도 있는 것으로 봐서 열심히 시 공부에 매달렸던 기록이라고 봐야죠.

 

두 번째로 중요한 거는 윤동주에게 있어서 이 날짜는 사실상 시가 일기의 역할을 했다는 거예요. 일기로 내면의 고백을 하는 건데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한편으로는 윤동주가 시를 쓰게 되었을 때의 한반도 상황과 연결해서 윤동주 시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 있고, 다른 하나는 윤동주의 시는 말 그대로 그냥 언어를 예쁘게 가다듬는 게 아니라 자기의 절실한 체험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 있어요. 이 점이 바로 윤동주 시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어요.

 

시를 언어 미학으로 보다는 일종의 ‘생체험의 표현’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준 예입니다. 물론 그런 시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대개는 상당히 많은 언어적인 의장을 가져온단 말이죠. 가령 비유를 쓴다든가 혹은 엉뚱한 다른 얘기를 함으로써 암시를 한다든가 했는데, 그에 비해 윤동주는 자기 고백이 굉장히 강해요. 윤동주의 시는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 쓴 것이라고 봐야 해요.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할 때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내고 싶어 했는데 스승인 이양하 선생이 위험하다고 만류했다고 해요. 그래서 손으로 필사한 3권을 만들어서 한 권은 본인이 간직하고, 한 권은 이양하 선생에게, 한 권은 친구 정병욱에게 주었어요. 그중 정병욱에게 준 시집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오늘날에 전해지게 된 것이죠. 근데 윤동주 시는 언뜻 보면 불온해 보이는 게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이양하 선생은 왜 위험하다고 했을까요? 윤동주의 시가 일종의 내면의 절실한 고백이었기 때문에 그걸 꿰뚫어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당시의 상황을 아주 깊이, 진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이양하 선생은 일제의 눈으로 볼 때 불온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Q. 정병욱 선생을 통해 소중한 시가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군요.

윤동주와 정병욱은 다섯 살 차이가 나지만 다정한 벗으로 지냈다고 해요. 윤동주에게 받은 시집을 보관하고 있던 정병욱이 일본에서 윤동주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됐겠죠. 하필 자신도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돼서 급히 고향인 하동으로 가져가 어머니에게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해 달라’고 당부하고 전장으로 떠났어요. 당시 정병욱의 집은 하동 맞은편 광양에서 술도가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정병욱의 어머니가 술도가의 한옥 마루장 밑에 구덩이를 파고 항아리에 시집을 넣어 숨겼고, 그게 살아남아 1948년 유고시집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거예요. 정병욱 선생은 회고 글에서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남겼어요. 감동적인 이야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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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를 쓴 날짜로 봤을 때, &lt;새로운 길&gt;은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에 입학한 후 처음 쓴 시로 짐작됩니다. 연희전문에서 공부하게 된 윤동주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용정에서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조선 문학과 역사, 조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배우기 위해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했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학교가 뒤숭숭하자 한 학기 만에 자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윤동주는 곧바로 광명중학교로 갔지만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1920년대부터 만주 지역은 민족주의가 사회주의 사상에 압도되고 있었어요. 젊은 학생들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비해서 훨씬 뛰어난 이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민족주의를 추진해야 된다는 분위기였어요. 사실 당시의 상당히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되었고, 머리가 뛰어난 송몽규도 그런 입장이었죠. 하지만 기독교 사상을 안으로 깊이 받아들였던 윤동주 입장에서는 상당히 견디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러니까 연희전문에 들어왔을 때 굉장한 감회가 있었겠죠. 이 핀슨관이 윤동주라는 사람을 태어나게 한 산실인데 정말 역사적으로 대단한 곳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연희전문에서 거닐던 ‘새로운 길’이 윤동주한테 새 출발의 자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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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던 시절, 송몽규와 윤동주는 &lt;문우&gt;지를 발간하고 한글로 작품을 게재했습니다. 지금도 &lt;문우&gt;는 발간이 되고 있는데요, 그 의미에 대해서 짚어주세요.

문우는 1941년 6월 5일 처음 발행이 됐어요. 편집 후기에 송몽규가 자기가 주도한 잡지라는 걸 명시를 했어요. 송몽규와 윤동주, 강처중이 문우회를 이끈 주요 인물이었죠. 강처중은 윤동주를 해방기 조선 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에요. 경향신문 기자였는데, 당시 경향신문 주간이었던 정지용에게 윤동주의 시를 보여줬어요. 정지용 시인이 이런 시가 있었냐며, 신문에 기사로 실으면서 “동섣달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이라고 찬사를 보냈죠. 

 

지금도 문우회가 이어지고 있죠. 얼마나 대단한 거예요. 이런 문예 잡지들은 누군가의 후원이 없으면 지속하기가 힘들거든요. 서양의 경우에도 대부분은 어떤 독지가의 후원에 힘입어서 유명한 철학자나 시인, 소설가를 주축으로 창간을 하고, 창간한 사람이 사망하면 대개 폐간되곤 해요. 한국 잡지도 비슷하죠. 그런데 <문우>는 창간 후 8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에요.

 

솔직히 학생들이 윤동주가 아니면 <문우>를 굳이 하겠어요? 문인 지망생들이 모인 연세문학회에서 내는 잡지 <연세문학>이 있음에도 <문우>가 또 하나 나오고 있잖아요. 잘 알다시피 연세문학회는 연세대학교 최대의 문학 동아리이고 무려 수백 명이 활동하고 있어요. 너무 인원이 많아서 한꺼번에 모이지도 못하고 시반, 산문반, 독서반, 송도반으로 분반되어 활동 중이에요. 이렇게나 많은 학생들이 문학 동아리를 하고 있으니까 연세대학교 출신 문인들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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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송몽규는 연희전문 입학 전,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선작 ‘숟가락’은 동아일보 자료로 남아 있긴 한데요, &lt;문우&gt;외에 송몽규의 글이 남아 있는 게 있는지 궁금해요.

송몽규는 상당히 뛰어난 사람이에요. 18세의 어린 나이에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면 얼마나 재주가 많은 사람인가를 알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일찍 이념에 경도되었고, 1932년에 김구가 모집하는 군관학교 생도로 지원을 해서 집을 떠나요. 군관학교 생도로 지원하기 이전부터 사회주의에 빠져 있었는데 자신은 어쨌든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떠났던 거죠.

 

그런데 거기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의 권력 다툼과 내분을 보고 엄청난 실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요. 얼마나 비참했겠어요. 그러니까 송몽규는 연희전문에 갈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군사적인 걸로 할 수 없다 판단하고, 문학으로 민족 교육과 계몽을 하는 데 뜻을 둔 것이죠.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혼란에 대해서 우리 민족의 결점을 지방적 편견과 당파심이 강하므로 단결심이 약할뿐더러 문화 수준이 낮은 데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민족적 결정을 시정하고 문화 수준의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고 송몽규가 말했다고 해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송몽규는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제대로 꽃피울 만한 환경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었다고 봐요. 이런 인물이 치세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요. 안타까운 일이죠.

 


Q.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 전체를 필사해서 간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지용, 백석, 릴케, 발레리, 지드 등 윤동주가 탐독하며 영향을 받았던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윤동주의 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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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정말 시인이 되고 싶어 했던 사람이니까 정지용이나 백석의 시를 가져다 모사한 시들이 좀 있긴 합니다만, 그건 거의 초기 습작에 몰려 있고 윤동주 자신이 발표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봅니다. 윤동주한테 새로운 면이 있다면 자기가 배운 지식에 더해 자신의 생각을 배합하는 상호텍스트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상호텍스트성 자체가 윤동주의 시적 독자성이라고 볼 수 있어요. ‘십자가’라는 시를 예로 들어 볼까요.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에 나오는 얘기를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변형시킨 것이에요. ‘내가 저기 예수 그리스도처럼 순교할 수 있는 여건이 나한테 왜 주어지지 않는가’ 알리샤가 하는 이야기죠. 이 부분을 가져와 자신의 이야기나 다름없는 것처럼 상당히 절실하게 말하죠.

 

그다음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건 성경에 없는 얘기예요.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죠. 그럼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는 누구 이야기일까요? 이차돈이죠. 불교가 조선에 들어올 때 모가지를 바친 사람이에요. 윤동주는 어렸을 때부터 엄청나게 많은 공부를 했어요. 특히 윤동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외숙부인 김약연 목사인데 맹자를 50번 이상 읽고 거의 외우다시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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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라는 시에서도 상호텍스트성을 발견할 수 있어요.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든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이 시에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에 별주부전이 함께 들어 있어요. 두 개의 신화를 독창적으로 섞어 자기만의 것으로 만드는 데 탁월하죠. 이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프로메테우스를 불쌍한 프로메테우스라고 규정하면서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라고 했거든요. 두 개의 신화를 겹쳐 놓으면서 내가 스스로 살아갈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냈어요.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엮으면서 거기에 한 사람의 역경을 헤쳐나갈 주체로서 나의 길을 어떤 방식으로 찾는가를 모색한 거예요. 이렇게 윤동주는 자기 공부를 하는 과정 속에서 독창적인 상호텍스트성을 만들어내곤 했어요.

 

<또 태초의 아침>도 한번 읽어볼까요?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창세기 얘기인데 뭔가 이상하죠.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저는 이걸 보며 이상했는데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더군요. 이 비밀을 문익환 씨가 남긴 말을 보고 알게 됐어요. 윤동주가 키에르케고르를 깊이 알고 있었다고.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은 소학교를 같이 다녔죠.

 

케에르케고르는 원죄를 하나의 인간이 통과해야 할 필연성으로 생각한 철학자예요. 원죄의 순간을 순수, 즉 ‘무지가 깨지고 불안이 들어오는 순간’으로 봤죠. 그러니까 이 시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그것을 풀어내는 해석이 매우 정교한 논리적 곡예를 펼치고 있어요. 그 당시 기독교인들 중에서 누가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었을까요. 놀라울 따름이에요.

 


Q. 윤동주의 시는 참회적 정서, 우울, 고독, 슬픔 이런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왜 그런 정서를 담게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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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삶은 끊임없이 구도하는 자세였고 그게 시에 그대로 반영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윤동주의 시는 그냥 읽으면 굉장히 여린 청년이 세상에 대해서 갖는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대부분의 청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시들이에요. 근데 꼼꼼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아요. 시 자체가 하나의 절실한 체험을 이뤄서, 시가 삶의 표현이나 삶의 반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데 있어요. 참회록을 살펴볼까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참회는 내가 무언가를 잘못 살아왔고 이걸 다시 잘 살아야겠다는 거잖아요. 근데 이 구절을 참회로 보기에는 너무 약해요. 그러면서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고 말하죠. 참회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는 건 새로 또 참회를 해야 된다는 얘기지요.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그러니까 첫 번째 참회를 부인하는 참회록을 써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구도자의 느낌만 있지 이게 무슨 뜻인지 아무도 이해 못해요. 

 

이 시는 이렇게 풀이를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24년을 살았는데 참 별 볼일 없었다. 내가 정말 뭔가를 이루지 못했다. 부끄럽다. 내가 이제 참회를 해야 되는데 참회가 제대로 되려면 부끄럽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미래를 가정하는 거예요. 내가 참회를 하고 있는데 지금 부끄럽다는 것은 미래에 내가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어야만 참회를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죠. 근데 미래에 내가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않을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는 것은 지금 부끄럽다는 감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만 미래에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거듭날 수가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지금의 참회가 미래의 나를 준비하는 하나의 행동이 되는 겁니다.

 

날마다 참회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극단적으로 정진시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윤동주 윤리를 ‘행이득지’ 행동으로서 지식을 얻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게 참회록의 진정한 메시지라고 봅니다. <참회록>은 굉장히 독특한 시예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윤동주의 시는 생체험의 표현이나 생체험의 반영이 아니라 그대로 생체험입니다. 윤동주는 시를 쓰는 그 순간에 이미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조금 어려운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만 이해가 되는 시입니다. 윤동주의 시는 언어 하나하나가 일종의 삶의 전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는 구절은 윤동주의 산문 <별똥 떨어진 데>를 읽어봐야 이해할 수 있어요. 윤동주는 별똥이 어디로 떨어졌을까 가상하는 게 아니라, 별똥이 어디로 떨어지기를 희망한다면 별동이 떨어질 데로 떨어지게끔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별똥 떨어지는 데의 주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라는 것은 별똥이 떨어질 자리를 가정해 두고,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지만 자기는 그 밑으로 가서 그 별똥이 떨어질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이라는 얘기죠. 윤동주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시와 산문을 같이 읽어봐야 돼요.

 


Q. 마지막으로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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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한테 시를 읽으라고 당부하는데, 남겨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서시>는 한국인들이 애송하는 시 1위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서시의 첫 두 행은 맹자.진심 상 편의 ‘앙불괴우천’을 변용해 한글로 풀어쓴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어야 된다. 윤동주가 김약연 목사한테서 맹자를 배운 거예요. 맹자의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는 건 일종의 보편 윤리예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으려면 세상이 명령하는 율법들을 따라야 하죠. 유교적인 율법들도 마찬가지고요.

 

윤동주는 이런 보편 윤리를 개인 윤리로 치환하는 사람입니다. 개인의 윤리로 치환하는 포인트가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에도 있지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부분에서 ‘나’가 끼어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에서 포인트는 뭡니까? 부끄러움이 없는 태도이죠. 부끄러움이 없는 태도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나를 벗어난 초자아적 명령들이에요. 개인 윤리가 ‘행이득지’라고 하는, 매 순간 행동하고 참회하고 반성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가 있겠죠.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도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이 성공 자체가 언제나 자기 성찰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게 윤동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윤동주 시인의 80주기를 맞아 시인의 짧았지만 치열하게 정진했던 삶을 마주해 본다. 시를 사랑하는 20대 청년은 식민지의 암흑 속에서도 매일매일 시를 쓰는 것으로 행동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기독교 정신을 내면 깊이 받아들이고 자신이 공부한 지식과 철학을 수용해 독자적인 시 세계를 지어갔다. 진지하고 고결한 윤리적 내성의 자세로 닦여진 윤동주의 시는 긴 세월을 뚫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가. 윤동주의 시를 다시 한번 음미하고 되새겨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