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형제의 《룸펠슈틸츠헨》과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으로 본 계약의 구속력과 공정 - 이름을 맞혀야만 계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 2026.10.19
한국 사회에서도 보조생식 시술로 다른 여성(대리모)이 임신·출산한 아이를, 대가를 받고 의뢰인(주로 불임 부부)에게 넘겨주기로 하는 대리모계약이 체결되고 있다. 계약에 따라 대리모는 아이를 의뢰인에게 인도해야 하고 의뢰인은 약정한 대가를 지급해야 하는가? 이하에서는 그림 형제의 《룸펠슈틸츠헨》(Rumpelstilzchen, 1812)과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 1600)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먼저 《룸펠슈틸츠헨》부터 보자. 이 작품은 그림 형제가 1812년 펴낸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Kinder- und Hausmärchen) 초판에 실린 이야기이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방앗간 주인이 왕 앞에서 허세를 부리려고 자기 딸이 짚으로 금실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딸을 짚이 가득한 방에 가두고, 아침까지 짚을 금으로 바꾸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한다. 울고 있는 딸 앞에 작은 남자(이하 ‘난쟁이’)가 나타나 목걸이를 받고 짚을 금으로 바꿔 준다. 둘째 밤에는 반지를 받고 짚을 금으로 바꿔 준다. 셋째 밤, 왕은 이번에도 해내면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하지만 딸에게는 난쟁이에게 더이상 내줄 것이 없다. 난쟁이는 왕비가 되면 첫아이를 달라고 하고, 딸은 그렇게 약속한다. 1년 뒤 왕비가 아이를 낳자 난쟁이가 찾아온다. 왕비는 왕국의 모든 재물을 주겠다고 하지만, 난쟁이는 살아 있는 것이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 귀하다며 거절한다. 왕비가 울자 그는 사흘 안에 자기 이름을 맞히면 아이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한다. 왕비가 보낸 신하가 숲속에서 불 주위를 뛰며 제 이름을 노래하는 난쟁이를 엿듣고 돌아와 전하자, 왕비는 ‘룸펠슈틸츠헨’이라는 이름을 맞힌다. 그러자 난쟁이는 화를 내며 떠나 버린다.”
《룸펠슈틸츠헨》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 왕비는 약속을 어겼는가? 계약은 꼭 지켜져야 하는가? 셋째 밤의 약속은 처음부터 공정한 계약이었는가? 우리는 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한 난쟁이를 악당으로, 약속에서 벗어난 왕비를 주인공으로 읽는가?
다음으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살펴보자.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의 구혼 자금을 위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며, 갚지 못하면 살 1파운드를 내주겠다는 증서를 작성한다. 바사니오는 벨몬트의 상속녀 포샤와 결혼하지만, 안토니오의 상선들이 난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빚을 갚지 못하게 된다. 샤일록이 증서대로 살을 요구하자, 포샤가 법학자로 변장해 재판에 나서 ‘살은 가져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선 안 된다’는 논리로 그의 주장을 무력화한다. 샤일록은 오히려 베니스 시민의 생명을 노린 죄로 재산을 잃고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베니스의 상인》 역시 우리에게 질문을 남긴다. 샤일록의 증서를 ‘피 한 방울’이라는 논리로 뒤집은 포샤의 판결은 타당하였는가? 살 1파운드를 주기로 한 계약까지도 지켜져야 하는가?
《룸펠슈틸츠헨》을 법률가의 눈으로 다시 읽으면 뜻밖의 사실이 드러난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성실한 계약 당사자는 난쟁이다. 그는 세 번 모두 먼저 계약대로 이행했다. 짚은 실제로 금이 되었고, 그 금 덕분에 방앗간 주인의 딸은 목숨을 건지고 왕비가 되었다. 그가 왕비에게 요구한 것은 미리 약속된 반대급부뿐이었다.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라틴어 법언은 근대 계약법의 출발점이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맺은 신약(信約)을 이행하라’는 것을 정의의 원천이 되는 자연법으로 놓았다. 신약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것은 공허한 말에 불과하고, 사람들은 다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칼 없는 신약은 말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계약의 구속력은 결국 그것을 강제할 주권자의 힘에 기댄다.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곤경에 처해 갚을 생각 없이 돈을 빌리는 거짓 약속을 예로 들어, 그런 준칙이 보편화되면 약속이라는 제도 자체가 무너지므로 아무리 궁박한 처지라도 허용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흥미롭게도 칸트가 상정한 이 사람은 셋째 밤의 방앗간 딸과 같은 처지에 있다.
그런데 왕비는 정말 약속을 어겼는가? 자세히 보면 그녀는 약속을 부인하지 않았다. 울며 사정했고, 아이 대신 왕국의 재물을 내놓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흘 안에 이름을 맞히면 면제한다’는 새로운 조건은 채권자인 난쟁이 스스로 제안한 것이었다. 법적으로 말하면 이 이야기는 계약 파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채권자의 제안으로 계약 내용이 변경되고 채무자가 그 조건을 성취한 이야기에 가깝다. 왕비는 바뀐 계약을 지켰다.
그럼에도 독자는 처음부터 왕비 편에 선다. 난쟁이가 아무리 정직했더라도 아이를 넘기라는 약속만큼은 지켜져서는 안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직관이 바로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의 한계선이 어디인지를 묻는다.
이 한계선을 가장 극적으로 시험한 작품이 《베니스의 상인》이다. 대금업자 샤일록은 안토니오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하자 법정에서 증서대로 살 1파운드의 이행을 요구한다. 법정 장면은 《룸펠슈틸츠헨》과 놀랍도록 닮았다. 바사니오가 원금의 두 배, 세 배를 내놓아도 샤일록은 돈이 아니라 증서를 원한다며 거절한다. 왕국의 재물을 마다한 난쟁이처럼, 그는 금전 배상 대신 본래의 급부를 고집한다. 샤일록 역시 먼저 이행한 채권자였고, 공동체 바깥의 이방인이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채무자 안토니오의 태도이다. 그는 공작조차 법의 집행을 거부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이방인에게 보장된 권리를 부정하면 베니스의 정의가 의심받게 되고, 베니스의 상업과 이익이 여러 나라 사람들과의 거래 위에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계약의 엄격함은 여기서 강자의 무기가 아니라, 시민권도 없는 소수자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한 평등의 무대이다. 그런데 결말은 이 무대를 뒤집는다. 법학자로 변장한 포샤는 증서가 유효하다고 선언한 뒤, 살은 가져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되고 정확히 1파운드여야 한다고 판결한다.
19세기 독일 법학은 이 장면을 두고 정면으로 맞섰다.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은 《권리를 위한 투쟁》(Der Kampf ums Recht, 1872)에서 샤일록의 편에 선다. 법정이 증서를 유효하다고 인정해 놓고 말꼬리를 잡아 이행을 막은 것은 비열한 술책이며, 무너진 것은 샤일록 한 사람이 아니라 베니스의 법 자체라는 것이다. 예링에게 샤일록은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한 사람이었다. 요제프 콜러(Josef Kohler)는 《법학의 법정에 선 셰익스피어》(Shakespeare vor dem Forum der Jurisprudenz, 1883)에서 반박한다. 포샤의 판결은 낡은 형식주의를 넘어서는 더 높은 법의식의 승리이며, 그런 증서는 애초에 선량한 풍속에 반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논쟁은 이 글의 질문을 정확히 둘로 쪼갠다. 예링은 ‘계약은 지켜져야 하는가’를 묻고, 콜러는 ‘그 계약은 공정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옳은 지점이 있다. 법이 증서를 유효하다고 인정했다면 말재주로 뒤집는 것은 법의 신뢰를 허문다는 예링의 지적도, 사람의 살을 담보로 한 약정은 처음부터 법이 보호할 대상이 아니라는 콜러의 지적도 그렇다.
결국 이 논쟁이 남기는 질문은 하나이다. 부당한 계약을 막는 올바른 방법은 계약 자체를 무효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문언 해석으로 우회하는 것인가? 셰익스피어의 극은 후자를 택했지만, 오늘의 법은 콜러의 길, 곧 전자를 제도로 만들었다. 사람의 살을 베는 일은 생명과 신체를 직접 침해하는 것이고, 계약 자유는 인간의 존엄과 사회질서라는 한계 안에서만 인정된다. 그런 약정은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에 해당하여 무효이다(민법 제103조). 증서를 유효하다고 해 놓고 피 한 방울로 뒤집을 필요 없이, 처음부터 무효라고 말하는 것이다.
포샤의 판결과 왕비의 이름 맞히기는 같은 구조를 가진다. 둘 다 계약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고, 계약의 문언 안에서 기지와 행운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둘 다 그 대가는 먼저 이행한 이방인 채권자가 치른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한다. 이 계약들은 애초에 누가, 어떤 조건에서 맺게 만든 것인가?
우리는 이 이야기를 왕비와 난쟁이의 대결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첫 거래는 그보다 앞서 있다. 방앗간 주인은 왕 앞에서 체면을 세우려고 딸의 능력을 부풀렸다. 딸은 그 말에 동의한 적이 없지만, 아버지의 허풍은 곧 딸의 목숨을 건 채무가 되었다. 왕은 ‘금을 만들지 못하면 죽는다’는 조건을 걸었고, 셋째 밤에는 금을 만들어 내면 왕비로 삼겠다고 했다. 혼인조차 금과 맞바꾼 거래였다.
이야기 끝까지 아무도 이 첫 계약을 문제 삼지 않는다. 딸을 담보로 내놓은 아버지도, 죽음으로 위협하고 그 금으로 왕비를 얻은 왕도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왕은 금과 왕비와 후계자를 모두 얻고 이야기에서 조용히 퇴장한다. 대가를 치르는 것은 숲속에 혼자 사는 이름 없는 이방인, 난쟁이뿐이다. 구조가 만든 강박이 두 약자의 개인적 대결로 바뀌어 버린 셈이다.
오늘의 법으로 보면 《룸펠슈틸츠헨》에서 셋째 밤의 약속은 애초에 효력을 가질 수 없다. 사람, 그것도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급부의 목적으로 삼는 약정은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반하는 법률행위로 무효이다(민법 제103조). 죽음의 위협 아래서 다른 선택지 없이 한 약속은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불공정한 법률행위에도 해당한다(민법 제104조).
앞서 본 샤일록의 증서와 마찬가지이다. 결국 오늘의 왕비라면 이름을 맞힐 필요가 없다. 이름 맞히기라는 행운이 하던 일을 이제는 법이 대신한다. 다만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법이 형식적으로 그런 권리를 주기만 하면, 약자는 정말 그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가?
그림 형제의 《룸펠슈틸츠헨》과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헨리 메인은 《고대법》(Ancient Law, 1861)에서 진보하는 사회의 움직임을 ‘신분에서 계약으로’의 이동이라고 요약했다. 《룸펠슈틸츠헨》 속 방앗간 딸의 이야기는 이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듯 보인다. 아버지가 마음대로 처분하던 딸이 셋째 밤에는 스스로 약속하는 계약 당사자가 된다. 그러나 그 ‘자유로운’ 계약은 죽음의 위협과 빈손이라는 조건 위에서 맺어졌다.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그 자리를 채운 계약은 형식만 자유로웠다.
독일의 법학자 오토 폰 기르케(Otto von Gierke)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했다. 그는 독일민법전 제1초안(1888)이 로마법적 개인주의, 곧 서로 대등하고 추상적인 개인을 전제로 한다고 비판했다. 1889년 강연 「사법의 사회적 과제」(Die soziale Aufgabe des Privatrechts)에서는 사법에도 사회적 연대의 정신이 스며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형식적 평등, 곧 계약자유가 실질적 불평등 위에 놓이면 불평등을 교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한다.
그의 통찰은 ‘계약은 강자에게는 무기, 약자에게는 무딘 도구’라고 정리할 수 있다. 강자에게 계약자유는 착취를 합법화하는 무기가 된다. 약자에게도 이론상 거부하고 취소할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행사할 경제력과 정보와 사회적 지지가 없으면 그 권리는 무딘 도구에 그친다.
《룸펠슈틸츠헨》의 왕비가 빠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서 다시 보인다. 그녀를 구한 것은 법이 아니라 왕비라는 지위였다. 왕국 곳곳으로 신하를 보낼 수 있는 힘이 있었기에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약속을 맺던 셋째 밤의 방앗간 딸이었다면 신하를 보낼 수도, 이름을 알아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계약에서 벗어나는 길조차 힘이 있는 자에게만 열려 있었던 셈이다.
아이를 데리러 온 난쟁이에게 왕비는 왕국의 모든 재물을 내놓겠다고 한다. 법률가의 언어로 바꾸면, 본래의 급부 대신 금전으로 배상하겠다는 제안이다. 미국 연방대법관을 지낸 올리버 웬들 홈스(Oliver Wendell Holmes Jr.)는 「법의 길」(The Path of the Law, 1897)에서 계약을 지킬 의무란 결국 지키지 않으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예측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생각은 훗날 법경제학의 ‘효율적 계약 위반(efficient breach)’ 논의로 이어진다. 이행보다 배상이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라면, 계약을 깨고 배상하는 편이 오히려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홈스의 눈으로 보면 왕비의 제안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난쟁이가 받을 이익은 아이 하나이고, 왕비가 내놓는 것은 왕국의 보물 전체이다. 그런데 난쟁이는 거절한다. 살아 있는 것은 세상의 모든 보물보다 귀하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여기에 이 이야기의 역설이 있다. 아이를 계약의 대가로 삼은 사람도 난쟁이이고, 아이는 돈으로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난쟁이이다. 그는 아이를 상품으로 거래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상품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 모순은 난쟁이 개인의 모순이 아니라 그 계약 자체의 모순이다.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을 계약의 목적으로 삼은 약정은 이행을 강제할 수도, 배상으로 갈음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계약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What Money Can’t Buy, 2012)에서 어떤 재화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순간 그 의미 자체가 훼손된다고 지적했다. 홈스의 계약관은 모든 의무를 가격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몸(신체)과 생명, 아이처럼 가격으로 환산되기를 거부하는 것들 앞에서 그 전제는 멈춘다. 계약은 지켜져야 하지만, 계약이 다룰 수 있는 대상에는 처음부터 경계가 있다. 민법 제103조가 바로 그 경계를 긋는 조항이다.
그렇다면 계약의 공정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공정은 고정된 기준이 아니라, 당사자 사이의 권력 불균형에 비례해 커지는 의무이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약속해 떠안은 의무(책무)는 공정의 원칙에서 나온다는 롤스의 말과 이어진다. 마사 파인먼의 취약성 이론과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 이론을 결합해 생각해 보면, 권력이란 다른 사람의 근본적 필요와 기본권을 배타적으로, 또는 거의 배타적으로 충족시키거나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권력의 크기는 약한 쪽이 강한 쪽에 얼마나 의존하는가로 잴 수 있다. 그리고 의존이 클수록 강한 쪽이 지는 공정의 의무도 커진다. 각국의 입법이 개인 사이의 계약보다 사업자와 소비자 사이의 계약에 더 엄격한 불공정 조항 기준을 두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우리 약관규제법 제6조는 신의성실에 반해 공정성을 잃은 약관 조항을 무효로 한다.
이러한 틀로 방앗간 딸의 세 밤을 다시 보자. 첫째와 둘째 밤의 거래에는 목걸이와 반지를 주고 금을 받는, 그나마 주고받을 것이 있는 교환이었다. 그러나 셋째 밤 딸에게는 더 내줄 것이 없었고, 그녀의 목숨은 오직 난쟁이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난쟁이는 그 순간 그녀의 생존을 배타적으로 쥔 문지기였다. 의존이 가장 컸던 그때 난쟁이의 공정 의무도 가장 컸어야 했지만, 그는 바로 그때 가장 큰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절대적 권력으로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왕은 가장 무거운 공정 의무를 지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강박의 원천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대리모계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리모계약의 당사자는 대등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절박한 여성,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의뢰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 거래를 설계하고 이익을 얻는 중개업자가 있다. 셋째 밤의 방앗간 딸처럼, 대리모는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 자기 몸과 아이를 대가로 내놓는다. 의존이 클수록 공정의 의무도 커져야 한다면, 그 거래를 만들어 내는 쪽이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23조 제3항이 대가를 조건으로 한 배아·난자·정자의 제공과 그 알선을 금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계약이 맺어지는 자리도 달라졌다. 뒤에서 살펴볼 대법원 사건의 의뢰 부부와 대리모도 인터넷의 ‘대리모 카페’를 통해 처음 만났다. 오늘날의 계약은 낯선 사람들이 플랫폼 위에서 맺는 일이 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소통과 노동, 정보 접근이 몇몇 거대 플랫폼에 의존하게 된 디지털 경제이다. 이용자는 수십 쪽의 약관을 읽지 않고 ‘동의’를 누른다. 다른 선택지가 사실상 없고 읽는 비용이 얻는 이익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소위 ‘합리적 무관심’). 이런 플랫폼이 시장의 강자를 넘어 타인의 기본권을 관리하는 문지기, 준(準)국가적 존재가 되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유럽연합의 디지털서비스법(DSA)이 초대형 플랫폼에 기본권 위험 평가를 요구하고, 유럽연합의 인공지능법(AI Act) 제27조가 고위험 AI 배포자에게 기본권 영향평가를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지배적 플랫폼에 요구되는 공정을 ‘존엄의 공정’이라 부를 수 있으며, 그 실천적 방법은 약한 쪽의 처지를 미리 헤아려 설계에 반영하는 공감(empathy)일 것이다.
이름의 의미도 여기서 새롭게 읽힌다. 동화에서 권력은 이름을 아는 데서 나왔다. 왕비는 신하를 보내 숲속에서 홀로 노래하는 난쟁이의 말을 엿들었고, 그의 이름을 손에 넣는 순간 계약의 주도권을 쥐었다. 오늘의 플랫폼은 모든 이용자의 이름과 습관과 취향을 알지만, 이용자는 자신을 분류하는 알고리즘의 이름조차 모른다. 이름을 아는 쪽과 모르는 쪽 사이의 계약이 대등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공정의 의무는 이름을 아는 쪽이 더 크게 져야 한다. 대리모계약에서도 이름은 곧 힘이었다. 계약이 무효가 된 뒤 힘을 쥔 것은 아이의 출생에 관한 비밀, 곧 아이의 ‘진짜 이름’을 아는 쪽이었다.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대리모는 계약대로 아이를 넘겨야 하는가? 대법원은 2025년 이 질문에 처음으로 정면으로 답했다. 대법원은 대리모계약이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고 자녀를 거래의 객체로 삼아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므로 민법 제103조에 따라 무효라고 판단했다. 모자관계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사실로 정해진다고 보았고 대리모가 친생모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기로 한 합의 역시 같은 이유로 무효라고 판단하였다(대법원 2025. 4. 24. 선고 2022므15371 판결).
그런데 이 사건의 뒷이야기는 동화보다 씁쓸하다. 부부는 아이를 친생자로 신고하고 정성껏 길렀다. 그러나 대리모는 출생의 비밀을 폭로하겠다며 부부를 여러 차례 협박해 거액을 받아냈고, 결국 공갈죄 등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이름을 아는 쪽이 권력을 쥔다는 동화의 법칙은 현실에서 이렇게 작동했다. 사실을 알게 된 열한 살 아이는 큰 충격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대법원은 아이의 복리가 친자관계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하므로, 대리모가 요청한 것과 같이 진실한 신분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의 복리에 현저히 반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그 소송이 소권 남용(소송을 낼 권리를 부당하게 행사하는 것)이 될 수 있다며 사건을 돌려보냈다.
이 판결은 이 글의 두 질문을 모두 담고 있다. 계약은 지켜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니다, 처음부터 무효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무효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공정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계약이 무효가 된 자리에는 법적 공백이 남는다. 그 공백에서 누가 더 약한지는 시간이 흐르며 뒤바뀐다. 처음에는 돈이 필요했던 대리모가 약자였지만, 나중에는 협박당한 부모가, 그리고 끝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아이가 가장 약한 자리에 섰다. 《룸펠슈틸츠헨》에서도 셋째 밤의 약자였던 방앗간 딸은 1년 뒤 신하를 부리는 왕비가 되었다. 공정의 의무가 의존의 크기에 비례한다면, 그 의존의 방향이 바뀔 때 법의 시선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대법원이 계약의 무효에서 멈추지 않고 ‘아이의 복리’라는 기준을 세운 것은 그러한 움직임을 보여 준다. 계약이 무효가 된 자리에서 아이의 복리를 지키는 일, 그것이 우리가 이어 써야 할 이야기의 다음 장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상가들은 각기 다른 곳을 겨눈다. 홉스와 칸트는 계약을 왜 지켜야 하는지를 물었고, 예링과 콜러는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를 두고 맞섰다. 기르케는 형식적 자유 뒤에 숨은 불평등을, 홈스와 샌델은 돈으로 갈음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왕비가 약속을 어겼는가를 묻는 대신, 그 약속이 누구에 의해 어떤 조건 위에서 맺어졌는가를 묻는 것이다.
계약은 지켜져야 하는가? 원칙은 ‘그렇다’이다. 다만 그 원칙이 왜 성립하는지가 중요하다. 롤스를 따라가면, 약속을 지킬 의무 자체가 공정이라는 원리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계약이 지켜져야 하는 근거와 계약이 공정해야 하는 근거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공정을 잃은 계약은 구속력의 근거를 스스로 허물어뜨린다. 그리고 공정의 크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대방이 나에게 의존하는 만큼 커진다.
《룸펠슈틸츠헨》에서 계약의 굴레를 푼 것은 법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신하가 마침 숲속을 지나다 노래를 엿들었기 때문에 아이는 무사했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샤가 ‘피 한 방울’이라는 말재주로 증서를 뒤집은 것처럼, 옛이야기 속 약자는 행운이나 기지로만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출구는 대개 힘 있는 자리에 올라선 뒤에야 열렸다.
오늘의 법은 그 우연을 제도로 바꾸어 왔다. 반사회질서 법률행위의 무효(민법 제103조), 불공정한 법률행위의 무효(민법 제104조), 신의성실의 원칙(민법 제2조), 약관규제법의 불공정 조항 통제(제6조 이하)가 그것이다.
약속의 무게를 지키는 일과 그 약속이 약자를 짓누르지 않게 하는 일은 둘 다 법과 제도의 몫이다. 《룸펠슈틸츠헨》에서 이름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무기였다. 왕비는 난쟁이의 이름을 알아내 이겼고, 이름 없는 이방인은 숲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법이 할 일은 누군가의 이름을 맞혀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숲속의 이방인에게도, 출생의 비밀 속에 갇힌 아이에게도 제 이름을 지켜 주는 것이다. 그런 법이 서 있는 사회, 계약의 공정이란 결국 그 사회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