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묻다 - 인간폐지 시대,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다섯 가지 열매

법학전문대학원 서종희 교수
  • 202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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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Max Weber)는 《직업으로서의 학문》(Wissenschaft als Beruf, 1919)에서 구약성경의 에덴동산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이미지를 빌려, 근대인이 ‘인식의 나무 열매(Früchte vom Baum der Erkenntnis)’를 먹은 대가로 주술적·종교적 세계관을 잃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근대 인류는 학문과 합리화로 세계가 탈주술화(Entzauberung)되면서,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부담이 생기게 되었다. 베버의 열매는 주어진 의미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무거운 자유를 놓았다. 그런데 현재 인류는 AI와 생명과학 기술이 가져다준 열매를 먹으면서 점점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베버 시대의 탈주술화가 신을 밀어내었다면 현대의 과학기술은 인간 자체를 밀어내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를 잃어가는 것에 대한 우려는 고전에서도 다수 발견된다. 이하에서는 여러 작품 속에서 발견된 공명(Resonance)을 하나씩 살펴본 후, 우리에게 필요한 열매가 무엇인지 찾아보고자 한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だざい おさむ)의 《인간실격》(人間失格, 1948)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감정과 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스스로를 추방한다. 술에 중독되고 자살 미수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파괴해 가던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인간으로서 실격”되었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 소설은 다자이 자신의 자전적 고백이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는 인간 사회의 규칙, 감정, 욕망의 작동 방식을 관찰자로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어서 ‘익살’이라는 가면을 쓰고 인간 세계에 맞추기 위한, 자신을 숨기기 위한 연기를 한다. 베버의 맥락에서 보면, 요조는 너무 일찍, 너무 깊이 인식의 열매를 먹은 것이다. 요조의 비극은 ‘인식이 존재를 앞질렀다’는 데 있다. 그는 타인의 감정, 사회의 위선, 관계의 허구성을 너무 선명하게 꿰뚫어 본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살 수가 없다. 그의 웃음, 친절, 그리고 사랑도 모두 연기이다. 

 

이것은 AI 시대의 인간 조건과 정확히 겹친다. AI가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감정마저 알고리즘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인간은 요조처럼 자신의 자연스러움을 신뢰하기 어려워진다. CRISPR(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로 유전자를 편집하고, 뇌를 업로드하고, 노화를 멈춘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인간으로 이해되기 어려울 수 있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벗어난 존재는 요조처럼 묻게 될 것이다.

 

“나는 인간인가, 인간을 연기하는 무언가인가?”

 

요조는 탈주술화를 개인의 내면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간 인물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감정과 사회의 규칙을 투명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왜 웃는지, 왜 친절한 척하는지, 관계 안에 얼마나 많은 허위가 숨어 있는지를 너무 선명하게 알았다. 그 과잉 인식이 그를 스스로 파괴하고 “인간으로서 실격”을 선언하게 하였다. 베버가 말한 탈주술화가 문명 전체의 이야기라면, 요조는 그것을 한 개인의 삶으로 겪어낸 자였다. 
C.S. 루이스는 《인간의 폐지》에서 교육이라는 열매가 가슴 없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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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인간의 폐지》(The Abolition of Man, 1943)

C.S. 루이스는 1943년 영국의 한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서 이 책의 단초를 발견한다. 그 교과서는 ‘폭포는 숭고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 화자의 감정 표현일 뿐이라고 적시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이 사소해 보이는 교육적 실천 속에서 서구 문명 전체를 무너뜨릴 씨앗을 보고, 인간은 머리(이성, 분석하고 해체하는 능력)와 배(욕망, 날것의 욕망과 충동) 사이에 가슴(감정, 도덕적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루이스는 현대 교육이 모든 가치 판단을 주관적 감정에 불과한 것으로 가르침으로써, 이 둘을 매개하는 가슴을 제거하고 인간을 ‘가슴 없는 인간(Men Without Chests)’으로 만든다고 본다. 교육이라는 열매를 먹은 인간은 자신이 가슴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루이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도덕 전통을 중국어 개념 ‘道(Tao)’로 부르면서, 이것이 해체될 때 일부 인간이 기술을 통해 나머지 인간을 설계하고 지배하는 세계가 온다고 경고한다.

 

“인간에 의한 자연 정복은 결국 일부 인간에 의한 나머지 인간의 폐지가 된다.”

 

물론 루이스의 열매는 베버의 열매와는 다르다. 루이스의 교육이라는 열매는 느끼는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더 효율적으로 통제 가능한 인간으로 만든다. 분석적 이성만 남고 도덕 감수성이 제거된 인간은, 루이스의 표현대로라면 가슴은 없고 머리와 배만 있는 존재이다. 루이스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설계하는 순간이었다.

 

“자연을 정복한 인간은 사실 인간을 정복한 소수의 인간이다.”

 

AI 교육 알고리즘이 아이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느끼게 할지 결정하는 순간, 루이스의 경고가 현실이 된다. 가슴을 설계당한 인간은 스스로 가슴이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가슴 없는 인간이 만드는 다음 세대는 열매를 먹을 능력조차 잃게 될 것이다. 분석하고 해체하는 이성만 남고 감동하고 저항하는 가슴이 사라진 인간은 더 영리하고 더 효율적이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옳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거룩하다고 느끼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루이스의 통찰은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나를 보내지 마》에서 확인된다.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 2005)

《나를 보내지 마》에 등장하는 헤일셤 학생들(캐시와 토미)은 장기 기증을 위해 복제된 인간들이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사랑한다. 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들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요조가 스스로를 인간실격으로 선언했다면, 《나를 보내지 마》의 캐시와 토미는 처음부터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도록 설계된 존재이다. 요조는 스스로 인간실격을 선언(내부로부터의 추방)한 반면에 캐시와 토미는 사회가 그들을 인간실격으로 규정(외부로부터의 추방)한다. 《나를 보내지 마》는 인간이 기술로 조작되고 그 희생이 제도화되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데, 가장 섬뜩한 것은 캐시와 그 친구들이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헤일셤에서 저항하지 않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설계의 열매를 먹은 사회는 캐시와 같은 타인의 존재를 수단으로 삼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설계의 열매를 먹은 것은 사회였고, 그 열매의 값을 치른 것은 캐시와 토미였다. 이 지점에서 루이스와 이시구로는 만난다. 캐시와 토미가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무지 때문이 아니었다. 헤일셤이라는 학교가 그들에게 예술과 감성을 가르친 것처럼 보였지만, 루이스의 경고처럼 그 감성을 조용히 복종의 형태로 길들였다. 가슴을 설계당한 존재는 저항해야 한다는 느낌 자체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계산된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한다. 이것이야말로 베버가 경고한 합리화의 최종 형태인 저항할 이유마저 합리적으로 제거당한 존재의 모습이다. 


우리는 역사적 증언을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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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I sommersi e i salvati, 1986)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 유대인 화학자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기억을 공유하고 증언한다. 레비는 인간이 인간을 조직적으로, 합리적으로, 효율적으로 폐지한 아우슈비츠에서의 기록을 독자에게 알린다. ‘회색지대(Gray Zone)’는 레비가 남긴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아우슈비츠 안에는 순수한 가해자와 순수한 피해자만 있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수감자를 감시한 자들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도구가 된 자들이었다. 레비는 이것을 도덕적으로 단죄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라면 달랐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레비가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도덕적 자기확신을 해체함으로써 더 깊은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는 열매이다. 그리고 이 열매는 루이스의 경고와 정확히 맞닿는다. 루이스가 가슴 없는 인간을 경고했다면, 레비는 그 결과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를 목격했다. 고도로 교육받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인간들이 가슴 없이 작동한 결과가 홀로코스트였다. 레비는 살아남은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우연과 타협의 산물이었음을 고백한다. 가장 선한 자들이 먼저 죽었고, 살아남은 자는 그 사실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다. 레비는 충분한 압박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인간의 가슴은 폐지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그 기억이 루이스가 말한 가슴이며,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이다.

 

“이것은 일어났다. 따라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인 시대에 필요한 열매

《시민론》(De Cive, 1642)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로 인용한 홉스(Thomas Hobbes)는 자연 상태의 인간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으로 묘사했고, 더 큰 늑대가 작은 늑대들을 통제한다는 논리를 전제로 리바이어던 — 강력한 국가 권력 — 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베버의 탈주술화된 세계에서 인간은 서로를 계산의 대상으로 삼았고, 루이스의 가슴 없는 교육은 다음 세대를 도구로 만들었으며, 이시구로의 사회는 복제인간의 장기를 취함으로써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임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실현했다. 다자이의 요조는 이 늑대들의 세계를 너무 선명하게 보았기에 스스로 먹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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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였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AI와 생명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는 일부 인간이 거대한 늑대가 될 수 있다. 홉스가 제시한 리바이어던은 늑대짓을 억제하는 장치였지만, AI 시대의 리바이어던은 알고리즘과 플랫폼 기업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리바이어던은 홉스가 상상한 것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늑대짓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늑대짓을 데이터로 수집하고 상품화하여 다시 인간에게 판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정교해진 것이다.

 

거대한 늑대의 등장을 방치할 것인지, 그 늑대를 발견하여 감시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그 선택이 가슴이고, 그 가슴이 인간이며, 그 인간이 다음 세대에게 건넬 열매를 결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열매를 골라야 하는가?

 

첫째, 취약성의 열매이다.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이 《진심의 힘》(Daring Greatly, 2012)에서 말한 것처럼, 완전히 통제되고 최적화된 존재는 연결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취약성은 약점이 아니라 연결과 용기의 출발점이 된다. AI가 모든 것을 예측하고 설계하는 시대에, 오히려 예측 불가능하게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 — 취약성 — 이 인간이라는 증거가 된다. 통제할 수 없는 것 앞에서도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 그것이 인간다움이다. 캐시와 토미가 끝까지 사랑했던 것도,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증언한 것도, 요조가 파괴되면서도 연결을 갈망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통제되지 않을 자유, 상처받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 그것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즉 취약성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취약성을 감수하면서도 관계와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의지가 인간다움의 핵심이다.


둘째, 기억의 열매이다. 레비가 가장 강조한 것은 단순한 역사적 기억이 아니다. 내가 누구의 덕으로 살아남았는가를 기억하는 것이다. AI 시대의 편익을 누리는 자는 그 편익의 이면에서 밀려난 자를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것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 저항의 열매이다. 루이스가 말한 가슴을 되찾는 것이다. 효율과 최적화의 논리에 “그것은 옳지 않다”고 느끼는 능력의 함양이 필요하다. 캐시가 끝내 갖지 못했던 능력을 기르기 위해 교육받고 훈련해야 한다. 루이스의 역설처럼, 가슴은 교육으로 파괴될 수도 있지만 교육으로 회복될 수도 있다.


넷째, 경이(驚異)의 열매이다. 탈주술화로 잃어버린 경이로움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AI와 생명과학이 열어놓은 세계는 오히려 새로운 경이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 이 질문들은 과학이 답을 제시할수록 오히려 더 깊어진다. 경이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앎의 끝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


다섯째, 연대의 열매이다.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것은 혼자의 힘이 아니었다. 누군가 빵을 나눠줬고, 누군가 언어를 가르쳐줬다. 회색지대 안에서도 균열처럼 존재했던 작은 연대들이 희망이다. AI가 개인을 최적화하고 분리하는 시대에, 연대는 가장 비효율적이면서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다. 

 


다시 한번 인간의 존엄성: 법과 제도의 역할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늑대를 위한 자유는 종종 양에게는 죽음을 의미했다(Freedom for the wolves has often meant death to the sheep)”라고 말했다. 우리 시대에도 거대해지고 교묘해진 늑대에게 자유만을 부여할 수 없다.


AI와 생명과학 기술이 인간을 분석하고 설계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기술 규제가 아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헌법상의 기본 원리, 곧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엄중하게 바라보면서 해석하고 구체화하는 일이다. 인간의 감정, 기억, 유전자, 행동 데이터가 상품화되는 시대에 법은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최소한의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취약성·기억·저항·경이·연대의 열매는 단순한 윤리적 덕목이 아니라, 앞으로의 사회가 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인간성의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법과 제도를 통해 이를 챙기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폐지 시대에 연세대학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언더우드와 연세대학교의 설립자들은 효율적 계산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역병과 가난의 땅인 조선에 대학을 세웠다. 가장 비효율적인 자리에서 가장 인간적인 일을 한 것이다. 효율과 최적화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대학은 비효율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효율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며 그래야만 한다. 효율로는 자라지 않는 것들 — 의미, 비판, 경이, 저항의 언어 — 이 그 비효율의 시간 안에서만 싹트기 때문이다. 당장 쓸모없어 보이는 질문, 답이 없는 토론, 불편한 고전 — 이것들이 가슴을 훈련하는 도구이다. 인문학, 철학, 역사학이 대학에서 밀려나는 것은 단순한 예산 문제가 아니다. 루이스의 언어로 말하면, 대학 스스로가 가슴을 제거하는 기관이 되어 가는 것이다. 연세대학교는 연세의 설립 정신에 맞게 비효율을 선택하고, 가슴을 기르는 대학이 되어야 한다.


에비슨이 조선의 고통을 기록하고 세계에 알렸듯, 오늘의 연세대학교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회색지대를 기록하고 증언해야 한다. 잊는 것이 가장 큰 공모(共謀, Complicity)라는 레비의 말은, 연세의 설립자들이 몸으로 실천한 정신과 다르지 않다.


앨프리드 마셜(Alfred Marshall)이 케임브리지 경제학 교수 취임 강연에서 “케임브리지가 세상으로 내보내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 나의 가장 소중한 야망이다 —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Cool heads but warm hearts)을 가지고, 주변의 사회적 고통과 씨름하는 데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이라고 말한 것처럼, 연세대학교가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인재를 세상에 내보내는 지성의 요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