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화예술의 가능성과 연세의 미래 가치

임유경 교수 / 이윤재 현대문화예술연구원, 국어국문학과
  • 202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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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가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이 그 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생각했다. 이번 수상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까닭은, 작가 특유의 깊고 섬세한 언어와 윤리적 감응의 밀도로 쌓아 올린 문장들이 국경을 넘어 서로 다른 삶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까이에서 체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는 언어가 서로를 연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안고 글을 쓴다고 말했는데, 과연 문장을 타고 전류처럼 흐르던 감각들은 세계의 독자들에게도 잘 도착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이제, 그 순간을 돌아보는 일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이 성취는 한 개인의 탁월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장에서 의미 있는 위치를 점하게 된 배경에는 창작·출판·번역이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해 온 문학적 기반이 자리하고 있다. 근대 이후 식민과 분단의 상흔, 산업화와 민주화의 파고, 도시화와 이주의 격동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억압적 시대의 문턱을 넘어 자신의 언어를 지켜온 작가들, 군부독재 시절과 거대 미디어 자본의 확장기 속에서도 문학의 영토를 꾸준히 만들어나갔던 출판사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체계적인 번역 지원과 국제교류를 통해 한국문학의 경계를 넓혀온 여러 기관들. 이들 모두가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실질적이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다층적 협력 위에서 ‘한강’이라는 이름은 영어권을 넘어 이탈리아, 독일, 터키, 베트남, 몽골, 아랍어권 등 다양한 언어권의 독자에게 닿을 수 있었다. 문학의 언어는 국경을 넘지만, 그 이동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힘은 공동의 노력과 축적된 유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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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대학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한강, 봉준호, 박진영 등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 가운데 다수가 연세의 캠퍼스에서 예술적 감수성과 창의적 상상력을 키워왔다. 이들은 서로 다른 매체와 형식을 통해 예술적 작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연세의 ‘지금 여기’에서 자유와 책임, 실험의 정신과 공동체 감각을 체득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한강이 “정확히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선선하고 자유로운 바람 같은 것”이 대학 시절의 풍경에 밑그림처럼 불고 있었다고 회고했듯, 그 “고유한 감각적 경험”은 한 사람의 문체를 이루고, 한 사회의 문화적 기풍을 형성하는 토양이 되었다.(「‘자랑스러운 연세인상’ 수상 소감」, 2025.1.14.) 대학이 단지 전문 지식을 습득하는 장소를 넘어, 새로운 감각과 언어가 실험되고 감각적·윤리적 자아가 형성되는 미래의 산실일 때 문화예술은 비로소 지속 가능해진다. 교양 교육과 창작 교육의 연계, 지역 공동체와의 긴밀한 접속, 동시대 예술과의 지속적 대화를 설계하는 대학의 프로그램들은 예술가의 도전과 실패, 전환과 도약이 가능해지는 기회의 장을 열어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윤재 현대문화예술연구원은 대학의 문화적 자산을 계승하고 확장하는 허브가 되어, 이곳에서 자라날 미래의 예술이 그 가능성을 다채롭게 모색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문화예술 생태계는 한 사람의 재능, 여러 기관의 헌신, 공동체의 자유로운 예술 정신에 대한 존중과 문화 향유의 풍토가 맞물리면서 구성된다. 누군가의 잠재적 역량은 공동체의 고유한 특성과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자라나되, 때로는 그 조건을 초과하며 확장되기도 한다. 연세의 자유로운 정신과 창의적 학문 풍토가 앞으로도 문화예술 성장의 동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교육과 연구의 새로운 설계와 실천이 끊임없이 모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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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현대문화예술연구원이 학제적 연구, 창작의 실천, 예술교육과 국제 교류를 아우르는 플랫폼을 구축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은 개인의 창의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술은 사회적 구조와 공동체의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그 속에서 자라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동하고 있는 예술적 영감과 작가적 열정이 꽃피우기 위해서는 정신적·문화적 풍토의 조성과 함께, 이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연세의 미래 가치는 바로 이러한 모색을 통해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연세의 학생들이 무수한 도전과 실패를 기꺼이 거듭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나가는 데, 우리 연구원이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