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와 신촌, 혹은 지금 여기의 자유
- 2025.08.19
2호선 신촌역에서 정문 앞까지 이어지는 길이 제2백양로임을 모르는 연세인은 없을 것이다. 엄연히 학교 밖의 공공 도로임에도 우리는 그 길을 백양로의 연장으로 생각해 왔고, 신촌 일대는 학교 밖이면서도 여전히 교내이기도 한, ‘열림’과 ‘닫힘’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었다. 신촌 하숙집은 연세인의 기숙사였고, 곳곳에 자리한 식당은 학생식당이자 아지트였으며,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던 술집들 또한 일종의 세미나실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신촌은 그저 대학 주변에 있기 마련인 유흥가만은 아니었다. 다른 대학 주변이 어땠는지 엄밀하게 비교해 봐야겠지만, 적어도 신촌에 있는 동안은 여전히 학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감각이 남아 있었고, 신촌과 캠퍼스는 서로 기묘하게 뒤섞이며 연세인에게 배움과 나눔, 논쟁과 놀이가 공존하는 공간적 경험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신촌은 더 이상 학교와 뒤섞이는 공간이기를 멈추었다. 물론 많은 연세인이 여전히 신촌을 찾는다. 하지만 신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홍대 앞, 연남동, 합정동, 망원동 등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신촌은 그저 주변 동네 중 하나가 되었고, 그마저도 다소 매력이 떨어진 지역으로 전락했다. 상권은 활기를 잃었고, 공실이 눈에 띄게 늘어났으며, 정작 연세인조차 그곳에 머무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그 원인을 두고 여러 분석이 제시되었다. 제2백양로를 차 없는 거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동 인구가 줄었다든가, 1학년이 송도캠퍼스로 가는 바람에 신촌에 활기가 없어졌다든가, 프렌차이즈 업체들이 공간을 차지하면서 동네의 개성이 사라졌다든가 하는 진단들. 모두 일리 있다. 하지만 이런 정책적이고 물리적인 이유만으로 신촌의 쇠락을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신촌과 연세가 독특한 공간 감각으로 얽혀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신촌의 쇠락은 아마도 연세의 무기력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연세가 무기력하다고? 누군가는 강력히 이의를 제기할지 모른다. 대학 랭킹은 해를 거듭할수록 상승 중이고, 수많은 졸업생들이 사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냐고, 특히 문화예술계로 눈을 돌려보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이 아니냐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 연세대학교 졸업생들의 활약을 보면 무기력 따위를 입에 담는 것은 어불성설일 터다. 하지만 그렇기에 신촌의 쇠락은 더욱 큰 문제다. 신촌이 사라진다면, 바로 그 눈부신 성취들이 재생산되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연세춘추에 모 교수가 지적했듯, 봉준호 감독과 같은 인물을 길러낸 토양은 단순히 ‘연세대학교’가 아니라 ‘연세와 신촌’이 결합한 독특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연세인들이 배우고 체득한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바로 ‘자유’였다. 이 땅의 10대들은 가장 자유롭고 창의적이어야 할 시기에 엄격한 규율과 경쟁 속에서 자라며, 자유를 유예한 채 대학 입학만을 기다린다. 그래서 대학은 한국 청년들에게 유예된 자유와 등치되는 시공간을 지시하는 기표이기도 한 셈이다. 대학은 강의실과 도서관, 연구기관들로 이뤄진 지성의 공간임과 동시에, 학생회실과 동아리방, 곳곳에 여백의 숲과 잔디밭으로 이뤄진 자율과 무위(無爲)의 공간이기도 하다. ‘연세와 신촌’이 하나로 이어졌던 시절, 신촌은 캠퍼스가 확장된 장이었다. 연세인들은 그 안에서 ‘유예된 자유’가 무엇인지 수행적으로 물음과 대답을 반복했고, 그 과정을 통해 자아와 타자와 자연과 사물이 공존하는 세계를 감지하고 표현할 수 있었다.
대학에 대한 지나친 낭만화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학이 더 이상 유예된 자유를 체득하고 고민하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면, 사회 전반에서 자유가 싹트기는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기는 대학 입학이라는 ‘다음 단계’만을 위해 의미화된다. 그런데 만약 대학마저도 그저 또 하나의 과정으로 전락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라는 시간은 무의미해지고, 모든 경험이 미래에 종속되는 사회에서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의 고민과 성찰 없이, 자유는 애초에 싹틀 수 없는 것이다. 연세 졸업생들이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서 눈부신 성취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현재’와 ‘자유’를 진지하게 사유하고 가꾸었던 결과다. ‘연세와 신촌’이라는 공간이 지녔던 아우라는 곧 자유의 수행이었다.
이윤재 현대문화예술연구원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신촌 문화예술 프로젝트’(가칭)를 기획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낭만화하거나 옛 시절을 복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화예술은 자유를 전제로 하고, 자유란 다양한 문화예술적 실천을 통해 체득된다. 지금 여기의 시공간이 다음 스텝을 위한 과정으로만 전락할 때, 자유는 망실되며 문화예술의 토대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 연구원은 우선 연세와 신촌이란 공간의 역사, 현재, 미래를 현장 참여형 연구를 통해 다채롭게 그려볼 예정이다. 졸업생 인터뷰, 신촌 현장기술지, 문화예술 팝업 스테이션, 랜드마크 리빌딩 등 졸업생, 재학생, 공공기관, 상가 주민을 아우르는 참여형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과 자유의 의미를 문화예술을 매개로 탐구하고 공유하려 한다. 앞으로 전개될 연구원의 활동에 동문과 지역사회의 관심과 참여, 그리고 건설적 비판과 질타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