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 텍스트의 윤리
- 2025.04.17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하고 그것을 의미화하는 과정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한다. 무엇보다 영화를 관람하는 ‘공간’은 영화적 경험이 구성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거실 소파 위에서든, 책상 앞에서든, 침대 속에서든, 혹은 극장 안에서든 저마다의 방식으로 영화를 본다. 각 공간은 고유한 방식으로 감각적 경험을 구조화하며, 그러한 지각의 조직화는 영화를 보는 몸의 태도와 감정의 결을 바꾸어 놓는다.
내가 영화 <브루탈리스트>(2025)를 관람한 것은 2월 말쯤이었다. 개강을 앞두고 다소 느슨한 마음으로 부산 도심을 거닐다 보니 자연스레 영화의 전당으로 발길이 닿았다. 캔틸레버(Cantilever) 공법으로 구축된 이 건물은, 길이 162미터, 폭 6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빅 루프(Big Roof)’로 광장을 덮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 아니라, 비정형적인 곡선과 거대한 스케일, 그리고 보행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입면의 강렬함만으로도 이 건축물은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부산 영화의 전당 - Creative Commons]
트러스트 구조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지붕과 벽, 그리고 건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건축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했다. 건축이 단지 형태가 아니라 시선과 공기, 생각과 행동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매체라는 사실을 새삼 체감하며, 나는 2월의 날선 바람에 쫓기듯이 건물 외벽에 설치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그때 상영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고, 마침 시간도 있었고,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 한편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마지막 회차로 남아 있던 영화를 선택했다. 그 영화가 <브루탈리스트>였다. 영화의 러닝 타임이 3시간 34분 51초이고, 1시간 40분 34초에 15분간의 ‘인터미션’이 시작한다는 사실은 상영관 앞에 붙은 조그만 안내 포스터를 통해서 알았다. 인터미션이라...
영화는 훌륭했다. 여러모로 훌륭했다. 우선,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단 한순간도 영화의 밀도가 느슨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불안정한 한 인간의 삶을 집중해서 응시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영화는 1947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헝가리계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트(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생애를 그린다. 바우하우스에서 훈련받았지만, 홀로코스트 생존자라는 과거를 지닌 라즐로는 미국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이주민으로서의 삶을 강요받는다. 필라델피아에서 가구 사업을 하는 친척 아틸라에게 얹혀살게 된 그는, 미국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애쓰는 아틸라의 삶에서 일종의 강제된 문화적 자기 포기를 목격하게 된다. 이후, 의뢰받은 일이 틀어지자 아틸라는 라즐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모욕을 주며 내쫓는데, 낯선 도시에서 거리의 노동자로 살아가던 그가 다시 ‘건축가’로서 소명을 회복하는 계기는 부유한 후원자 해리슨 반 뷰런(가이 피어스)을 만나면서 비롯된다. 라즐로는 반 뷰런의 의뢰를 받아 ‘반 뷰런 창조 및 활동 센터’라는 복합 문화시설을 설계하게 되며, 이민자의 신분을 넘어 건축가로 자리매김할 기회를 얻게 된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그러나 영화는 아메리칸드림의 서사를 표층적으로만 활용할 뿐, 실질적으로는 이민자에 대한 미국 사회의 환대가 얼마나 위계적이며 폭력적이고 조건부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반 뷰런은 라즐로에게 처음엔 관대하고 협력적인 후원자로 다가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유대인 정체성, 출신 계급, 그리고 외부자적 위치를 조롱하고 통제하려 든다. 채석장에서 반 뷰런이 벨트를 풀고, 술에 취한 라즐로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장면은, 환대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기만과 폭력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당신네들은 왜 그렇게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을 해놓고 다시 동정을 요구하지?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 너는 창녀야”라는 말에는 라즐로와 같은 이주민은 미국 사회의 ‘시민’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수용된 존재,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이렇듯 <브루탈리스트>는 한 건축가의 생애를 따라가는 전기 영화의 형식을 취하지만, 이 전기의 윤곽은 어디까지나 흐릿하고 모호하다. 영화는 라즐로 토트라는 한 인물의 삶을 그리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출신과 역경을 둘러싼 생애사적 사실에서부터 비엔날레에서의 성취까지를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내 드러나듯, 라즐로 토트는 실존 인물이 아니며 그가 설계한 ‘반 뷰런 창조 및 활동 센터’ 또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의 삶의 행적은 미완으로 남아 있고, 그가 구현한 브루탈리즘 건축의 흔적 역시 매우 제한적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관객이 허구를 통해 실재를 상상하고 그것이 하나의 역사처럼 기능하는 과정을 유도하면서도, 그 허구성과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노출시킨다. 연출을 맡은 브레디 코베 감독은 라즐로라는 인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의 삶을 ‘구성된 이야기’로 환원하는가를 질문하려는 듯하다. 전기영화라는 장르는 종종 실존 인물의 삶을 단일한 서사로 매끄럽게 봉합하지만, <브루탈리스트>는 이 봉합 자체를 유예시킨다. 영화의 끝에 도달하더라도, 관객은 여전히 라즐로라는 인물을 ‘정리’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 그의 건축도, 그의 삶도, 그의 실패도, 결국은 중간에 끊긴 듯한 하나의 구조물처럼 남는다.
이러한 형식적 유예는 영화의 구체적인 장면들에서도 드러난다. 예컨대 라즐로가 매춘 여성과 맺는 육체적 관계, 혹은 후반부에 이르러 반 뷰런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은 명확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전자는 불투명한 거리감 속에서, 후자는 조명과 시점, 음향의 교란 속에서 재현되는데, 이는 단지 연출적 배려나 수위 조절이 아니라, 재현의 한계에 대한 자각으로 읽힌다. 영화는 라즐로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대신, 그 고통이 언어와 형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원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곧, 타인의 삶을 영화적으로 ‘완결’시키는 행위가 지닌 윤리적 문제를 반성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영화가 한 인물의 삶을 ‘끝까지’ 보여준다는 것은 종종 그를 이해하고 포섭했다는 착각을 낳지만, <브루탈리스트>는 오히려 재현의 불가능성 앞에 머무는 것을 택한다. 어떤 삶은 해명되지 않고, 어떤 고통은 해석되지 않으며, 어떤 인간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타자로 남는다. 바로 이 인식이 영화가 말하는 환대의 전제이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를 억지로 해석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 때였다. 상영관 뒤편에서 나와 어둠 속 계단을 내려오던 중, 내 앞을 걷던 중년 부부의 대화가 문득 귀에 들려왔다. “뭔 말을 하는 건지 알겠나?”, “요즘은 어렵게 만들어야 상을 주나 보네.” 낯설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 말들에는 나름의 진실이 들어 있다. 어떤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에게 이해받기를 거부하는 듯 보이고, 어떤 예술은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각이나 인식을 그 자체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해되지 않는 텍스트 앞에서 우리는 멈춰 서게 된다.
텍스트와 마주치는 모든 맥락에서 의미는 발생한다. 하나의 텍스트는 단일한 얼굴을 갖지 않는다. 누구와 함께 보았는지, 어떤 공간에서, 어떤 상태로, 어떤 기억과 감정 속에서 텍스트를 접했는지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망으로 펼쳐진다. 그러므로 어떤 텍스트를 오롯이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을 오롯이 이해한다는 것만큼이나 아득하고 요원한 일일지 모른다. 오히려 텍스트가 쉽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태도야말로 의심받아야 할 태도이다. <브루탈리스트>는 이러한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다. 관객은 라즐로 토트라는 한 인간의 삶을 따라가며, 그의 불분명한 과거, 불완전한 현재, 미완의 미래를 목격하지만, 결코 그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서사적으로 완결된 인물로 간주할 수 없다.
바로 그렇기에 이 영화는 하나의 건축물처럼 작동한다. 건축은 단지 기능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정주하고 움직이며 체류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구성된다. <브루탈리스트>는 재현을 통해 삶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현의 불가능성, 이해의 불완전성, 타자성의 도달 불가능성을 하나의 공간적 서사로 조직한다. 관객은 그 공간 속에 ‘배치’되어, 설명되지 않는 고통, 재현되지 않는 관계, 닫히지 않는 삶의 파편 앞에 놓인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행위인지, 그러나 그 불완전함을 감각하는 것이야말로 타자를 향한 환대의 윤리가 시작되는 출발점일 수 있음을 직면하게 된다.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 2025)
- 장르: 드라마
- 감독: 브래드 코베
- 출연: 애드리언 브로디, 펠리시티 존스, 가이 피어스
- 수상:
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남우주연상, 촬영상, 음악상)
78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음악상)
30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남우주연상)
40회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버라이어티상, 아웃스탠딩 감독상)
45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작품상)
8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작품상-드라마, 남우주연상-드라마, 감독상)
37회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작품상, 남우주연상)
50회 LA 비평가 협회상(미술상)
89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작품상, 남우주연상)
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은사자상-감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