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목소리들
- 2025.03.19
작년 겨울, 우리는 비현실적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일련의 사건들을 목도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기록된 ‘제주4.3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설로 쓴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며칠 후에, 그 잔혹함을 가능케 했던 ‘계엄령’이 2024년 대한민국에 재등장한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한국의 국회의사당 현장이 생중계되고, 전 세계 언론에서 이를 톱뉴스로 다룬 덕에, 저는 해외 각지에 살고 있는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저의 안부를 묻는 걱정 가득한 이메일과 DM들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후 혼란과 불안,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일상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감한 것은 영화, 소설과 같은 대중 서사 매체의 힘, 그리고 막연한 ‘희망’이었습니다. 만약 <서울의 봄>(2023), <1987>(2017), <택시운전사>(2017)와 같은 영화나 『소년이 온다』(2014)와 같은 소설이 없었다면, 그래서 현재의 우리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면, 상황은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요?
저는 한국 독립영화, 특히 다큐멘터리 장르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내세우며 오늘까지 꾸준히 제작되어 온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는 ‘진정성’을 무기로 상업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무거운 주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제가 진행하는 한국영화사 수업은 늘 독립영화에 관한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제주4.3사건(이하 ‘4.3’)을 다룬 독립영화 3-4편을 학생들에게 소개합니다. 김경만 감독의 <돌들이 말할 때까지> 역시 4.3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1980년의 광주가 ‘광주민주화운동’이라 공식적으로 명명되고 공적 역사에 속하게 된 것에 비해, 제주4.3사건은 여전히 ‘사건’으로 불립니다. 4.3은 여전히 명명되거나 재현될 수 없는, ‘암흑의 심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4.3은 2003년에야 국가에 의한 진상조사보고서가 만들어졌고, 2006년에서야 비로소 정부의 책임인정 및 사과가 있었습니다.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
<돌들이 말할 때까지>가 기존의 4.3 영화들과 다른 점은, 이것이 4.3 수감생존자 문제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영화에는 다섯 분의 피해 생존자 할머니들이 등장합니다. 그녀들은 스무살 내외의 젊은 나이에 4.3을 겪으면서 재판도 없이 육지의 형무소로 보내졌고, 수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감옥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누군가는 아이를 잃고, 밤낮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출소한 후에는 ‘빨갱이’라는 낙인에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자식에게도 전할 수 없는 비밀이었습니다. 이들은 4.3이 일어난 지 7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주4.3도민연대가 진행한 재심 재판을 통해 무죄가 인정되었습니다.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
할머니들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들의 강인함과 올곧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에 감동하게 됩니다. 인터뷰에 함께 출연한 한 생존자의 딸은 자신의 어머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4.3과 같이 살아서 그래서 저희 엄마는 그 광주 민주화 그거 저기 그거 청문회 할 적에도 하나도 안 빼놓고 다 보셨어요. 왜냐하면 그때 당한 게 똑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광주사태라고 할 적에도 그거 아니라고 하셨던…. 왜냐하면 4.3때 그 군인들한테 당한 게 너무해서 그거를 하루도 안 빼고 다 보셨어요.”
비극적 사건을 증언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롭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돌들이 말하기까지’ 너무나 큰 용기가 필요했고,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비로소 우리에게 들리게 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한 편의 영화나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원하는 것 자체가 판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 한 권의 책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의식은 관객이나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심층의식에서 내면화되어 시공간을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한강 작가님이 표현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너무나 추웠던 지난겨울, 불안과 혼란 속에서도 느꼈던 막연한 희망의 감각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故 서경식 선생님은 희망의 어원이 ‘희박하다’의 한자어 ‘희(希)’와 ‘전혀 없다’는 의미의 ‘망(望)’이라고 설명하면서, 희망을 “거의 없는 것, 그래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희망이란 깊은 어둠 속을 더듬어 걸어 나가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타자가 처한 어둠의 상황을 상상하여 “그 깊은 어둠 사이를 걷는 사람들의 힘”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이러한 ‘희망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길잡이라고 생각됩니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Until the Stones Speak, 2024)
- 장르: 다큐멘터리
- 감독: 김경만
- 수상: 18회 제주영화제(제주트멍), 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특별상 - 용감한 기러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