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책들 - 한 서양학 연구자의 다소 잡다한 저술 목록

영어영문학과 윤혜준 교수
  • 202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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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전에 만난 오랜 친구의 반응이다. 대학원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길 건너 이웃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 교수를 만나 다음 달에 교양서가 하나 나올 거라고 하자 그 친구는 그렇게 대꾸했다. ‘선생님, 이제 책 좀 그만 쓰세요.’ 작년 12월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한국영어영문학회 7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난 후 쉬는 시간, 그 대학에 있는 나와 같은 전공 교수가 한 말이다. 강연 내용이 현재 해외 모 출판사에서 심사 중인 국제 저서의 일부라고 소개했기에 그런 충고를 들었다. 이제 책 좀 그만 쓸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다가올 새 학기 기준, 2년 반이면 정년을 맞이하지만, 아마도 정년 후에도 집필을 계속할 듯하다. 이미 책 쓰는 것이 몸에 밴 생리적 활동이 된 터라, 늙고 병들어 누워서 하나님께 돌아갈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뭔가 계속 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연세대학교 연구업적 시스템(YRI)의 ‘저역서’ 영역에 들어가 있는 나의 저술 실적은 2025년 2월 현재, 총 54건이다. 단독 저서, 공저, 역서를 모두 포함한 숫자다. 내가 연세대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한 2004년 3월부터 세어보면 36건이다. 연세로 오기 전, 30대 철없는 소장학자 시절에 썼던 저·역서들은 건수는 많아도 내세울 만한 것은 별로 없다. 마땅히 갈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 기웃거린 모습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평론 성격의 글, 영어 실용서, 번역서, (연구업적으로는 등록하지 않았지만) 심지어 창작물도 있다. 학술서들은 주로 공저이고 선배들이 기획한 공동 작업들이다.

 

내가 나의 학문적 여정의 방향을 잡고 거기에 맞춰 나의 노동을 집중적으로 투입한 단독 저서들은 연세대학교에 온 이후에 생산되었다. 달리 말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일을 수행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연세대학교 덕분이다. 학창 시절 학부건 대학원이건 연세를 다닌 바 없는 내가 연세에서 일하게 된 것은 주님이 내게 주신 크나큰 축복이다. 내가 연세에 와서 쓴 책들도 연세가 아니면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성실하고 진지한 학자들인 나의 학과 동료 교수들은 내게 학문과 저술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한국과 외국에서 온 수준 높은 학생들은 나의 강의가 나의 연구와 연계될 수 있도록 내 수업에 참여했다. 세 차례 총 2년 반의 연구년 및 연구학기를 허락해 준 학교 당국의 기여도 컸다. 인문학자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 장서다. 자료가 풍부한 영국과 유럽 도서관 장서를 이용하고  현지 학자들과 교류를 통해 나는 연구의 내용을 채워갈 수 있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의 도움도 적지 않다. 지금도 진행형이기에 현재 시제를 쓴다. ‘중앙도서관’이 언제부턴가 이름이 ‘학술정보원’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나는 ‘도서관’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필요한 책들을 도서관에서 꼬박꼬박 구입해 주었고 지금도 상호대차로 신속히 우리보다 책을 많이 구입하는 타 도서관에서 자료를 가져다주는 서비스는 내게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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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제목에서 ‘나의 책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내가 쓴 책들이 모두 동등한 자격에서 ‘나의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의 책들’은 영어로 하면 모두 나의 ‘brainchild’(창조물, 머리가 낳은 자식)이지만, 그중에는 후회되고 숨기고 싶은 자식도 있고 비교적 맘 편히 내세울 수 있는 자식도 있다. 남과 같이 쓴 공저나 남이 쓴 책을 한국어나 영어로 옮긴 역서에 들어간 나의 노동은 그 성격이나 함량이 단독 저서의 경우와 같을 수 없다. ‘나의 책’에서 ‘나’ 또한 다소 그 정체성에 차이가 난다. ‘나’는 어떤 책들에서는 번역가, 어떤 저서들에서는 근대 영국소설 전공자, 또 어떤 책들에서는 통상적 영문학을 넘어서 융합연구를 시도하는 저자다. 융합연구도 다시 영문학 외에 (한국문학을 포함한) 다른 문학을 같이 연구하는 ‘비교문학’과 문학이 아닌 역사, 경제학, 언론학 등 학과나 단과대학 경계선을 넘어선 연구들,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명칭을 굳이 제시하자면 ‘나’는 ‘서양학 연구자’다. ‘동양학’이나 ‘한국학’이라는 말들은 사용하지만 ‘서양학’은 쓰지 않는다. 그러나 서구문명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수행하려는 나의 시도를 ‘서양학’이라는 말로 불러본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한국어가 모국어이고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고등교육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나의 책들은 한국어로 한국인 독자들을 위해 쓴 책들과, 영어로 써서 국제 학문공동체에 제출한 저서들로 나뉜다. 한국어 저·역서들은 ‘yes24’에서 ‘윤혜준’으로 검색하면 나열된다. 방금 검색해 보니 2025년 1월 말 현재, 총 52개 ‘상품’이 뜬다. 이 숫자에서 동명이인의 저서 4건을 제외하고 같은 책의 다른 판본들을 빼면 실제 저술은 대략 30종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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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혜준’이자 ‘Hye-Joon Yoon’이기도 하다. 이 이름을 ‘amazon.com’ 검색창에 넣어 클릭하면 3건의 단독 저술 학술서들이 뜬다. 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제목들이니 굳이 이 글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이 외에도 해외에서 서구학자들과 같이 낸 공저가 4건 더 있다. 이 저서들은 위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등장하지 않기에, 연세에 온 후 쓴 책들을 연도가 빠른 순서로 나열한다.

 

Edinburgh History of the British and Irish Press, Vol. 1: Beginnings and Consolidation 1640-1800 (2023)
The Role of Context in the Production and Reception of Historical News Discourse (2021)
Key Papers on Korea: Essays Celebrating 25 Years of the Centre of Korean Studies, SOAS, University of London (2013)


 
이상의 해외 출판 저술 중 단독 저서 둘은 한국연구재단의 저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한국연구재단 쪽에서 돈을 주며 국제 출판을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전혀 아니지만, 기왕 쓰는 김에 영어로 해외에서 출간하면 보다 많은 전문 독자들이 읽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매번 외국 출판사들의 문을 두드렸다. 퇴짜도 여러 번 맞았다. 반년씩 원고를 갖고 있다가 ‘미안하지만 당신 책은 다른 데 가서 알아봐야 할 듯해’라는 편지를 받으면 즐겁지는 않다. 국내에서 출판할 때는 이러한 수모를 겪을 일이 없다.

 

해외 출판 단독 및 공동 저술들은 모두 전문 학술서들이라 일단 책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개인 독자에게 파는 책들이 아니라 도서관에 파는 책들인 까닭이다. 해외 출판사들은 저자에게도 책 한 권 밖에는 주지 않기에 나도 내 책을 추가로 구입하려면 거액을 지불해야 한다(저자 할인을 받아도 여전히 비싸다). 실제로 해외에서 나온 ‘나의 책’ 중 대부분은 나도 한 권밖에는 갖고 있지 못하다. 해외에서 출간한 단독 및 공동 저서들은 모두 근사한 인세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는 했으나 이제껏 이 책들을 낸 출판사에서 내가 받은 돈은 단 한 푼도 없다. 연구비 지원을 받아 쓴 책들이기는 해도 출판시장에서 노동의 대가를 전혀 받지 못한다는 것은 역시 그다지 즐겁지는 않다.

 

국내에서 나온 책들에서는 수입이 약간 발생한 사례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책을 써서 돈을 벌고 싶은 저자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일단은 주제가 돈벌이 또는 정신이나 육체의 건강인 편이 유리하다. 또한 저자가 대중 앞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정치적 진영 논리나 기타 이유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열성 지지자 집단이 있거나, 아니면 텔레비전이건 유튜브건 (또는 둘 다) 자주 출연해 자신의 얼굴을 대중에게 알리고 수다를 떨며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얇게 썰어 먹여주거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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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 방학 때 문과대학 외솔관은 공사를 위해 건물 자체가 폐쇄되었다. 다른 동료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연구실 책들은 지금 건물 어딘가 박스 속에 갇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늘 뭔가를 쓰거나 쓸 준비를 하는 안 좋은 습성에 젖어있는 나는 집에서 계속 작업을 하고 있다. 서양 명시 50편을 골라서 번역하고 소개하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도 가미한 교양서의 교정쇄를 엊그제 넘겼다. 글을 시작하며 언급한 내 친구의 ‘또!’는 바로 이 책 출간 소식에 대한 것이다.

 

또한 나는 집에서 해외 모 출판사에서 심사, 검토하고 있는 영어로 쓴 학술서 일부를 보완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와 읽고 있다. ‘책 좀 그만 쓰라!’는 말을 듣게 만든 바로 그 책이다. 이번에는 영문학도 아니고 비교문학도 아니고 아예 18세기 영국의 경제, 정치, 법 담론만 연구한 책이기에, 집필에 투입된 노동은 지금까지 나의 모든 책들에 비해 더 많았다. 그렇지만 좀 더 많은 노동이 들어가야 할 모양이다. 출판사 하나에서 이미 퇴짜를 맞은 후라, 보완작업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제무대에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일은 매우 번거롭고 까다롭다. 검토자들은 계속 쏟아지는 최신 자료들을 언급하라고 요구하기 일쑤고, 자기 지시대로 잘 고쳤는지 확인한 후에 출판계약을 하겠다며 콧대를 높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책의 내용이 더 풍부해진다. 

 

한국어든 영어든, 원고가 인쇄물로 바뀌는 과정은 늘 조심스럽다. 교정에 교정을 반복해도 여전히 발견되는 오식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영어 원고의 경우, 같은 단어를 근접한 맥락에서 반복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기에, 말을 바꿔주는 것도 성가신 일이다. 또한 이미 책이 나온 후에 발견되는 오식이나 오류들은 더욱더 나를 뼈아프게 질책한다. 재판을 찍어 이미 인쇄된 흠들을 고칠 기회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하는 책들도, 다시 말해 여전히 초판 상태로 출판시장 변두리를 배회하는 나의 책들도 적지 않다.

 

나는 ‘나의 책’이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개입과 충고, 그리고 숱한 다른 저자들의 책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독자들의 눈높이와 입맛에 맞아야 한다는 점에서 ‘나’가 아닌 ‘남’의 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책은 (나 스스로에게 늘 하는 말대로) 요구르트가 아니다. 책은 유통기한이 긴 상품이다. 지금은 안 팔려도 서서히, 또는 조금씩 누군가 사서, 또는 빌려서, 읽는다면 저자로서는 그 자체가 큰 보상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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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주로 사실 위주로만 기술을 했다. 여기까지 읽으며 아마도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었을 법하다. ‘도대체 당신, 왜 책을 그렇게 많이 쓰는 거지? 동기가 뭐야? 돈?’ 돈은 아니다. 돈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것이 동기가 되지는 않는다. 연구비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액수가 나를 일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연구비를 받으면 반드시 제시간 안에 결과를 내야 한다. 연구비는 저자에게 ‘당근’이자 ‘채찍’이다. 지원금을 받지 않고 계약금만 받고 착수하는 교양서의 경우에도 나는 ‘대박’을 기대하고 쓴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왜? 인문학자로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신념 때문이다. 서구인문학은 내가 한국과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부터 일관되게 인간의 인간됨을 ‘해체’하고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그쪽으로 진격했다. 그때는 그 정도가 될 줄 몰랐으나 그 파급효과는 중등교육, 대중문화, 정치담론 영역으로 퍼져나갔다. 

 

인문학은 한자어 그대로 풀어본다면 인간(人)에 대한 글(文)을 연구하는 공부(學)다. 그 인간을 성욕의 노예, 젠더 실험의 모르모트, 각종 정치투쟁 전선에 투입할 요원으로 축소시킨 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뒤흔드는 역할을 인문학과 문화 예술에 부여하고, 오직 그것만 장려하고 허용하는 분위기가 서구 사회 그리고 서구의 영향을 받는 이 나라에도 확산되고 있다. 나는 인간에 대한 시각이 사뭇 구식이다. 흔히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뛰어난 인문학자이기도 한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가 1625년에 출간한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이라는 엄청나게 긴 저서의 마지막 발언은 나의 신조이기도 하다. 그로티우스는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 인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왔고 어떠한 유산들을 남겨주었는지, 그것을 망각과 왜곡, 선전과 선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능한 한 진실되게 재구성해서 알리고 그렇게 하므로 인간의 본모습을 지켜내는 데 지극히 미미하나마 약간의 기여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서, 또한 그렇게 내 책이 사용되기를 주님께 기도하며, 나는 오늘도 책을 쓴다. 

 

 

*윤혜준 교수는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영어영문학과 외에 비교문학협동과정, 언더우드국제대학 비교문학문화전공, 학부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또한 인문학연구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비교문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