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영화의 빛깔
- 2025.01.16
온난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지속되는 전쟁과 기근... 총체적 난국을 맞은 오늘날의 현실은 단순한 원인에 대한 결과로 파악될 수 있는 사건들로 이뤄지지 않는다. 일관된 질서와 의미 체계로써 해석되는 세계에 더 이상 살고 있지 않다. 선형적인 인과관계로 세계를 파악하던 관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지구인들에게 매일의 일상은 기이할 정도로 같은 모습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스타벅스에 가면 늘 같은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스트리밍 서비스의 새 영화들을 소비한다. 전 지구적인 위기가 무색할 정도로 하루하루는 변함이 없다. 국제정치학자 브라이언 클라스(Brian Klaas)가 말하듯, 지구 전체의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삶은 안정적이다. (클라스에 따르면, ‘부분의 안정’과 ‘전체의 불안정’의 불균형은 그 반대로 여겨지던 근대화 이전의 세계관으로부터 역전된 형국이다.)
부분적 안정의 환상으로 일상을 채우는 일관된 요소로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단순한 인과관계에 의해 사건들이 설명되고 결국 공동체의 강화로 마무리되는 자체완결적인 서사는 영화의 발명 직후 문학 및 연극과의 인연이 깊게 맺어지면서 백 년이 넘게 강력한 규범으로 작동해왔다. 이미지와 시간의 단상들을 배치하고 공간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서의 ‘할리우드’라는 미학적 토대는 하나의 완성된 세계관으로서 여전히 강력하게 우리의 삶이 안정적이라는 인상을 축조한다. 지구의 재난을 직면하는 서사조차 영화에서는 공동체의 안정을 지향하고 지지한다. 전 지구적인 위기를 인식함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가장 탁월한 ‘지역적 안정’의 장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관을 필요로 한다.
1968년에 만들어진 <석류의 빛깔>이라는 영화는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바닥에 깔린 하얀 천 위에 석류가 세 개 놓여 있다. 정물화에 가까운 시간의 정지는 석류 밑으로부터 붉디붉은 액체가 스며 나오며 고요히 깨진다. 하얀 표면을 피처럼 붉게 적시며 퍼진다. 이어지는 이미지는 이 문장의 출처로 보이는 고서를 보여준다. 다음 장면에서는 살아 있는 생선이 역시 하얀 천 위에서 펄떡인다. 옆에 고스란히 놓인 말라붙은 나뭇가지가 그나마 화면을 채우는 생선의 절박한 생명력에 차갑게 병치된다. 내레이터가 같은 문장을 두 번 더 반복한다.
“나는 고난뿐인 삶과 영혼의 소유자다.”
“나는 고난뿐인 삶과 영혼의 소유자다.”
<석류의 빛깔>을 만든 세르게이 파라조노프 감독이 의도했던 원래의 제목은 <사야트 노바>이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검열에 의해 시인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는 것을 금지당했고 상영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사야트 노바는 18세기에 살았던 아르메니아 시인이다. 그의 삶의 여정은 꽤나 파란만장하다.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시와 노래에 친해지고 여러 악기들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조지아의 왕 이라클리 2세에 의해 청년 사야트 노바는 궁정시인으로 발탁됐고 외교 사절의 역할을 맡기까지 한 걸로 전해지나, 왕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추방되었다. 음유시인으로 살다가 결혼까지 하고 평범한 삶에 정착하며 네 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46살의 나이에 부인을 잃고는 곧이어 승려가 되어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개종을 강요하는 페르시아 침략자들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지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것은 그의 나이 여든셋. 평생 수천 편의 노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중 이백 편이 넘게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러한 전기적 사건들은 매력적인 서사의 질료가 될 만하다. 실로 <석류의 빛깔> 아니 <사야트 노바>는 시인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의 굴곡을 연대기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위에 요약한 인생사를 이 영화의 ‘줄거리’로 여기기에 영화는 관습적인 이야기 방식들로부터 너무나 멀어져 있다. (위 내용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나 알 수 있을 만한 것들이다.) 세속으로부터 고립된 수도승의 영혼을 마주하듯 낯설기 그지없는 감각의 세계를 우리는 마주해야만 한다. 실로 편안한 마음으로 여타의 영화를 즐기듯 <석류의 빛깔>을 ‘관람’하노라면 시인의 인생사의 굴곡을 놓치기 십상이다.
사실 영화는 꽤나 충실하게 시인의 삶의 단상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연대기 순의 나열에서 벗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통상적인 사실주의의 친절함을 기대하다가는 인생의 큰 변화조차 놓치기 십상이다. 이를테면 첫 부분에 등장하는 꼬마,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시인이 경쾌한 걸음으로 옆에 서 있는 한 청년의 뒤로 몸을 숨기는 장면을 ‘유년기에서 청년기로의 성장’으로 읽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집중력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영화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독특한 서사 체계를 고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파라자노프 감독은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사실주의적으로 사건을 재현하는 데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영화는 차라리 사야트 노바의 내면을 상상적으로 스케치해 나가는 쪽에 가깝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배우들은 마치 연극무대에서 촬영을 한 초기 영화처럼 아무런 대사도 없이 정면을 향하고,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은 심지어 카메라를 응시하기도 한다. 모든 동작들은 최소한으로 정형화되어 실제 행위나 상황에 대한 묘사로부터 머나먼 현존을 무심하게 발산한다. 장소나 소품들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마치 인물처럼 의미 작용을 만들어간다. 기독교 회화를 해독하듯 ‘상징’으로서 사물들의 의미를 파악한다면 시인의 내면에 대한 의미심장한 단서들을 얻을 수 있다. 영화를 여는 세 개의 석류들만 하더라도 기독교 회화에서 통상적으로 석류가 상징하는 ‘예수의 수난’을 강렬하게 연상시킨다. 그의 삶을 함축하는 상징이랄까.
사과, 양, 닭, 공작, 칼... 역시 종교적 의미로 읽을 수 있는 각종 시각적 모티프들은 영화 내내 반복, 변형되며 시인의 삶을 관통하고 서사의 줄기를 만들어간다. 특히 가정적 안락함을 상징하는 카펫과 삶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해골은 영화 전체에 걸쳐서 반복, 변형되며 시인의 삶과 노래에서 읽을 수 있는 삶의 정서들을 시각적으로 대비시킨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부모 밑에서의 천진난만함과 결혼 시기의 세속적 삶은 카펫이라는 시각적 모티프로 관계를 맺으며 서사를 구조화한다. 사야트 노바는 시인이 되기 전에 천을 짜는 일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카펫이라는 모티프는 전지적 디테일이자 내면적 상징으로서의 이중적 의미를 갖는 셈이다.
물론 기독교적 상징으로 해독하는 것만이 이 영화 속 세계에 진입하는 유일한 경로는 아니다. <석류의 빛깔>은 그림이 아닌 영화로서의 매체적 잠재력을 극대화한다. 현실의 물성에 충실한 것이다. 사물들은 상징이면서도 동시에 진득한 물성을 지닌 비릿한 생물로서 감각을 찌른다. 흠뻑 젖은 책들이 돌에 눌려 물기를 토해내거나 지붕 위에서 건조되며 페이지들을 흩날리는 광경은 언어로 된 시를 물화시켜 놓은 듯하다. 거침없이 묘사되는 희생 제식은 양의 기독교적 의미를 양가적인 중첩으로 몰기도 한다.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역시 사랑 장면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청년기의 시인이 공주가 각자의 화면에서 마임처럼 취하는 자세들로 처리될 뿐이다. 사랑의 신비와 열정은 표정이나 대사와 같은 연극적 연기가 아니라 ‘낭송’을 표현하는 정제된 몸짓과 소품들로써 심화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인과 공주의 모습은 마치 오즈 야수지로 감독의 인물 쇼트들을 연상시키는 정면 버스트 쇼트로 처리되며 할리우드의 (얼굴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촬영하는) 30도 규칙이나 (마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화면상 반대로 처리하는) 180도 규칙에 의거한 정사/역사의 패턴을 훌쩍 이탈해버린다. (할리우드의 정사/역사 모델에 귀속되지 않는 촬영 방식으로 본인만의 언어를 구축한 감독이 역사적으로 몇이나 될까.) 시인의 손에 들린 악기는 사랑의 열정과 기독교적 상징으로서의 ‘영혼’을 중첩시키며 청년기의 정열을 대변하고, 그가 손에 드는 장미의 아름다움은 끝말잇기처럼 꺾인 생명의 덧없음을 이어받는 해골의 상징성에 이르며 이 영화의 큰 주제 중 하나인 죽음을 불러들인다. 인간과 세계의 필멸성을 마주하는 세계관. 이에 응답하는 공주의 손에 쥐어진 하얀 레이스는 ‘직물’ 모티프를 변형시키며 순수함을 떠올린다. 여기에 보물처럼 숨어 있는 이 영화의 비밀 아닌 비밀은 공주와 시인을 연기하는 배우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사야트 노바, 아니 파라자노프 감독의 ‘뮤즈’로 알려진 ‘소피코 치아우렐리’라는 배우다.
같은 배우가 사랑을 노래하는 위치와 응답하는 역할을 번갈아 연기하며 두 위치는 기묘하게 동일시된다. 이러한 독특한 연출은 (어린 시인이 목욕을 하는 남성의 나체를 엿보는 장면 등과 더불어) 이 영화가 머금는 동성애 코드로 읽히기도 한다. 간혹 인용되는 시 구절은 무성영화처럼 간자막으로 처리된다.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배우의 입을 빌리는 대사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아니, 정확히는 하느님을 수수께끼처럼 대변하는 허름한 지붕 수리공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다. 시인의 말년에 이르러 작품의 주제가 소리로 발화된다. “죽어라.” “죽어라.”
<석류의 빛깔>의 관객이 된다는 것은 삶과 죽음, 언어와 물질, 시와 영화의 사이를 떠도는 방랑자로서의 여정에 드는 것이다. 때로는 탐정처럼 숨은 단서들을 탐색해야 하고, 때로는 기도하는 승려처럼 인간 너머의 질서에 경건하게 머리 숙이기도 한다. 언어학자와 미술평론가의 사이에서 언어와 물성의 절묘하고도 수려한 상호작용들을 탐구해야 할 때도 있다. 그때 ‘해독’과 ‘정동’은 구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어적이고도 즉물적인 미장센의 낯선 초대를 받아들이고 사실주의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감각의 영역에서 이러한 감각적인 장면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게 사야트 노바와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풍요로운 숭고미를 보상으로 선사한다. 이는 곧 영화의 표현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익혀야 함을 의미한다. 사야트 노바의 내면의 언어를 통해 파라자노프가 보여주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하나의 총체적인 결론이나 종결로 귀착되는 의미 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서사의 종결이 정확하게 명시되지도 않는다. (실로 이 영화에는 여러 버전들이 존재하고 이는 검열의 와중에서 발생한 불행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가 그리는 세계관은 파편처럼 조각난 모티프와 단상들의 소우주로 펼쳐진다. 그 단상들이 밤하늘의 별자리들처럼 만드는 패턴들은 인간세계와 그 너머의 질서에 대한 염원과 불안의 단서들을 흩뿌린다. 언어를 넘고 문화를 초월하는 존재론적 질문들. ‘영혼’의 언어랄까.
이 글을 시작하며 거창하게 세계관의 변화를 운운했지만, 그런 밑그림 위에서 이 영화를 소개한 것은 폐허의 시대에 종교적 귀의나 미학적 경건함이 필요함을 제안하기 위함은 절대 아니다. 지배적인 세계관을 대체하는 또 다른 세계관을 제시함도 아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체제들을 총체적으로 재고해야 하며 ‘오락’이나 소일거리가 그로부터 제외될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 잠재력을 따라가는 여정은 때로는 시간과 정신의 일상적인 굴레들을 벗어나야 하는 필요성을 동반한다. 영화의 매력이야말로 일탈과 탈구에 있지 않은가. 인터넷은 우리를 종종 폐쇄적인 굴레 안에 가두기도 하지만, 일상과 타성으로부터 벗어날 단서들을 주기도 한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디지털로 전환된 형태로나마 인터넷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 장르: 드라마
- 국가: 러시아(구 소련)
- 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 주연: 소피코 치아우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