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하는 몸, 지속되는 권리: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Orlando, 1928)로 읽는 여성의 법적 지위
- 2026.04.17
올랜도는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며, 작가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이자, 울프가 사랑하는 연인 비타 색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 1892~1962)이다. 더 나아가 올랜도는 그 당시의 모든 여성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580년부터 1928년까지의 올랜도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올랜도는 수백 년을 사는 동안 외모는 거의 늙지 않으며, 중반부에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이 바뀌어 남성과 여성의 삶을 모두 경험한다. 이 작품에서 올랜도는 1600년대 후반 콘스탄티노플에서 잠에 빠진 후 여성으로 깨어나게 되며 18세기에 영국으로 귀환하여 문학 살롱 시대(Literary Salon)를 살아간다. 살롱은 당시 대학과 클럽에서 배제된 여성들이 지적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올랜도 또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문학과 철학을 토론할 수 있었다. 올랜도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결혼하여 1928년까지 이르게 되는데, 소설 『올랜도』는 올랜도의 긴 대장정의 삶을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은 17세기 이후의 영국 여성이 가지는 법적 지위를 잘 보여준다.
올랜도는 원래 귀족 남성으로서 광대한 영지와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성이 된 후 귀국하자 법원으로부터 재산 소유권에 대한 소송이 제기된다. 여성은 재산을 소유·상속할 권리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올랜도의 영지 소유권 자체가 법적으로 문제 되었다. 이 소송은 소설 내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설정을 통해 당시 여성의 재산권 박탈을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실제로 연인인 비타 색빌-웨스트가 놀 하우스(Knole House)라는 대저택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상속받지 못하였는데, 버지니아 울프는 이러한 사실을 소설의 배경으로 활용한다. 놀 하우스는 영국 켄트(Kent)주 세븐오크스(Sevenoaks)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으로, 영국에서 가장 크고 역사적인 귀족 저택 중 하나이며, 엘리자베스 1세가 왕실 소유로 사용하다가 1603년 색빌(Sackville) 가문에 하사되어 이후 대대로 색빌 가문의 소유가 된다. 당시 영국 상속법상 여성은 귀족 작위와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어 비타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놀 하우스는 비타가 아닌 남자 친척(사촌)에게 상속되었고, 비타는 자신이 나고 자란 집을 잃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실제 경험을 『올랜도』에 그대로 녹여냈다.
이러한 시선은 여성의 상속권을 다룬 또 다른 작품인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과 이어진다. 『오만과 편견』에서 베넷가의 재산은 남성 직계에게만 상속되는 한정상속(Fee Tail Male) 조건이 걸려 있어, 딸만 다섯인 베넷 씨가 사망하면 재산 전체가 먼 남자 친척인 콜린스 씨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것이 베넷 부인이 딸들과 콜린스 씨의 결혼에 그토록 집착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제인오스틴은 한정상속 제도를 베넷가를 통해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여 비판하였고, 버지니아 울프는 올랜도를 통해 여성 상속권 박탈을 환상적으로 풍자하였다.
여성에게 상속이 금지되면 직업을 가지지 못한 여성이 생존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경로는 재산 있는 남성과의 결혼이었다. 결혼 못한 미혼 여성은 오빠나 남자 친척에게 의존해야 했다. 이것이 당시 ‘노처녀(Spinster)’가 사회적 비극으로 여겨진 이유이다. 의존할 남성이 없으면 빈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오만과 편견』에서 베넷 부인은 딸들의 결혼에 집착했던 것이다. 베넷 씨가 죽으면 베넷 부인과 다섯 딸은 그대로 집에서 쫓겨난다. 콜린스가 재산을 상속받기 때문이다. 베넷 부인의 신경쇠약적 결혼 집착은 히스테리가 아니라 슬프게도 생존 전략이었다. 당시의 논리와 정서로는 결혼 전략이 합리적 해결책으로 여겨졌다.
“어차피 재산이 남자 친척에게 가야 한다면, 그 친척이 딸과 결혼하면 재산이 가족 안에 머물고 여성의 생존도 해결된다.” 오스틴은 이것을 담담하게 묘사했지만 그 안의 공포는 매우 실질적이다. 『올랜도』에서는 올랜도가 여성이 되자 재산 소송이 시작된다. 동일한 사람인데 성별 하나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생존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 울프는 이것을 소설을 통해 환상적으로 그렸지만 비타의 실제 경험 — 놀 하우스 상실 — 은 전혀 환상이 아니다.
그런데 결혼만이 여성의 생존 수단이 되면 연쇄적인 문제가 생긴다. 결혼 자체가 생존 계약이 되고 사랑이 아니라 재산을 보고 결혼해야 하는 구조로 이어진다. 『오만과 편견』에서 샬럿 루카스(Charlotte Lucas)와 콜린스의 결혼은 이러한 구조를 잘 보여준다. 샬럿은 콜린스를 사랑하지 않지만 현실적인 경제 안정을 위해 그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오만과 편견』 속 베넷가의 이야기는 근친혼의 문제를 정확히 보여준다. 재산을 상속받을 콜린스는 베넷가의 친척이다. 그런데 그가 베넷가의 딸들에게 청혼한다. 제인에게 먼저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촌간의 결혼이 허용되는지이다. 현행 대한민국 민법 제809조는 8촌 이내 혈족 간 결혼을 금지하고 있으며, 최근 우리 헌법재판소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근친혼을 금지하는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위헌인지를 판단하였는데 합헌이라고 결정하였다. 반면에 당시 영국법에서 사촌간 결혼은 완전히 합법이었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교회법상 금지된 근친의 범위는 직계존비속과 형제자매, 그리고 일부 인척 관계에 한정되었고 사촌은 포함되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귀족과 젠트리 계층에서 사촌간의 혼인은 재산을 가문 안에 유지하는 전략으로 이루어졌다(생물학자 찰스 다윈도 사촌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여성의 상속 배제와 생존을 위한 선택으로서의 근친혼의 연결은 구조적 모순이 잘 드러난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남자 친척이 근친일 경우, 여성 앞에 놓인 선택지는 근친과 결혼해서 생존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재산을 가져가는 남자가 삼촌이라면 결혼이라는 선택지가 없어진다. 즉 생존의 선택지가 더욱 좁아지게 된다. 이는 상속 배제가 여성에게 얼마나 구조적인 생존 위협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구조에서 결혼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 생존의 문제가 되고 만다. 오스틴과 울프는 시대가 여성에게 결혼을 생존의 조건으로 강제한다는 것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방』의 이 유명한 테제는 올랜도와 연결된다.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그만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누이 ‘주디스’가 있었다면?”이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하는데, 실험 속에서 가상의 누이 주디스는 결국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올랜도』는 『자기만의 방』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울프의 소설적 대답이다. 주디스가 죽어야 했던 이유 — 돈도, 방도, 시간도 없었기 때문 — 를 울프는 올랜도에게 340년이라는 초자연적 시간과 광대한 영지를 부여함으로써 정면으로 돌파한다. 올랜도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하는 순간은 단순한 환상적 장치가 아니다. 『자기만의 방』의 시각으로 읽으면 이것은 특권의 박탈이다. 남성 올랜도는 재산, 지위, 시간, 글 쓸 자유가 모두 자동으로 주어지지만, 여성 올랜도는 동일한 인물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유권 분쟁 소송에 걸리고, 외출도 제약되고, 문학적 진지함도 의심받게 된다. 울프는 이를 통해 당시 여성과 남성의 격차는 재능이나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울프는 동일한 존재가 성별만 바뀌었을 때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올랜도를 통해 실험하였고 이를 명확히 증명했다. 『자기만의 방』은 논리와 증거로 독자를 설득하지만 『올랜도』는 환상과 유머로 독자에게 영향을 준다. 울프는 당시 이성적 언어로 다 담을 수 없는 문제의식을 소설의 언어로 보완한 셈이다. 『자기만의 방』이 “왜 여성에게 방이 없었는가?”를 분석한다면, 『올랜도』는 “방이 있었다면 어떤 삶이 가능했을까”를 상상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두 작품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울프가 『올랜도』를 쓴 1928년의 맥락에서 성별 변환은 젠더 정치학적 선언이라기보다는 주로 연인 비타에 대한 애정, 여성의 사회적 제약에 대한 풍자, 그리고 모더니즘적 정체성 탐구의 장치였다. 그러나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를 넘는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읽으면 『올랜도』는 성별 자기결정권 담론과 매우 풍부하게 공명한다. “같은 사람, 다른 성별(the Same Person, Only the Sex was Different)”이라는 서술은 정체성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성별이 바뀌어도 올랜도는 올랜도이다. 이는 현대 트랜스젠더 담론에서 말하는 성별 정체성이 본질적 자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인식과 깊이 연결된다. 여성이 된 올랜도는 때로 남장을 하고, 때로 여성복을 입으며,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젠더를 표현한다.
“Vain trifles as they seem, clothes have, they say, more important offices than merely to keep us warm. They change our view of the world and the world’s view of us(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옷이란 단순히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 이상의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들 말한다. 옷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이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젠더 트러블』(1990)에서 제시한 “젠더는 수행(Performance)이다”라는 테제(젠더 수행성, Gender Performativity)를 60년 앞서 소설로 구현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올랜도에게 젠더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입고 벗을 수 있는 것에 가깝다.
올랜도 자신은 변하지 않았는데 세상이 달라진다. 재산권이 위협받고, 행동의 자유가 줄어들고, 문학적 진지함을 의심받는다. 울프는 올랜도를 통해 1928년의 감성으로 “성별은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가 덧씌운 옷이며, 진정한 자아는 그 모든 옷을 관통해 연속된다.”라는 문학적 선언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성별 자기결정권 논의에서 핵심적인 문제 — 즉 개인의 정체성 자체보다 사회가 그 정체성에 부과하는 제약이 문제라는 것 — 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한편 울프는 올랜도 안에 단일한 자아가 아니라 수많은 자아가 공존한다고 묘사하고 있어 『올랜도』가 성별 이분법을 넘어선 논바이너리(Non-Binary)적 정체성의 문학적 선구로 읽히게 한다.
올랜도의 세계에서 문제는 올랜도가 아니었다. 그가 어떤 옷을 입든 낯설어했던 시선이었다.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도 마찬가지다. 바뀌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다. 그들을 바꾸려 하지 말고, 그들을 취약하게 만드는 ‘구조’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