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는 무엇을 남기는가 — 한맥중공업 장창현 회장의 기부와 대학의 시간

이우영 교수 / 신소재공학과
  • 202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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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대한 기부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나는 숫자보다 먼저 그 기부가 어떤 시간을 향해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최근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한맥중공업 장창현 회장(금속공학 69)의 발전기금 100억 원 기부가 우리 대학교 신소재공학과를 향해 이루어졌다. 공과대학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부이지만, 이 기부의 의미는 ‘얼마인가’ 보다는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있다. 기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여러 대화 속에서, 장 회장이 반복해서 강조한 말은 “기술은 결국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는 문장이었다. 이 말에는 자신이 몸담아 성장해 온 모교와, 그 안에서 길러진 인재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산업 현장에서 체득된 경험의 요약처럼 들렸다. 연구 성과가 중요하지만 그 성과를 만들어내는 사람과 그 사람이 성장하는 시간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기술 역시 지속될 수 없다는 인식이다. 이번 기부는 그러한 신뢰가 대학이라는 공간을 향해 표현된 하나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신소재공학은 일반인에게는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학문이다. 그러나 반도체, 이차전지, 친환경 에너지, 피지컬 AI와 바이오 소재, 그리고 우주·항공 재료 등 전략 산업의 상당 부분은 결국 소재에서 출발하며, 이들 분야의 성취는 곧 국가 경쟁력의 중추를 이룬다. 문제는 이러한 연구가 단기간의 성과로 환원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실패와 축적, 반복과 기다림이 필연적인 영역에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번 기부는 결과를 요구하기보다 과정을 지지하는 선택으로 읽힌다. 기부 논의 과정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은, 지원의 초점이 ‘건물’이나 ‘시설’보다 ‘사람’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연구 환경의 개선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은 젊은 연구자와 학생들이 실패를 감내하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여백이다. 교육과 연구를 장기적으로 뒷받침하는 제도들은 당장의 성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구조야말로 대학이 학문 공동체로 기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학과의 학문적 신뢰와 브랜드 가치를 함께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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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해외 대학의 사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필자가 수학한 케임브리지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는 1874년 설립 이후 한 세기를 넘게 기초과학 연구의 전통을 이어오며 30명 이상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왔다. 그러나 내가 체감한 캐번디시의 힘은 화려한 성과가 아니라, 연구가 성급한 결론을 요구 받지 않고 오랜 시간 축적될 수 있도록 허락하는 학문 문화에 있었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스탠퍼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캐번디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레이 돌비(Ray Dolby)는 돌비 시스템(Dolby Laboratories)을 창업해 기술 혁신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그 성과를 최근 학문 공동체로 환원해 8,500만 파운드(약 1,500억 원)의 개인 기부로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 연구소 역사상 세 번째로 신축된 건물인 레이 돌비 센터(Ray Dolby Centre)를 건립했다. 이 센터는 최첨단 실험 시설을 갖춘 물리학·공학·수학을 아우르는 융합 연구 인프라로서, 단기 성과보다 미래를 향한 학문 축적과 인재 양성에 투자하고 있다. 이 사례는 기부가 성과를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학문이 자라날 시간을 다시 대학에 ‘되돌려주는’ 일임을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대학 차원의 기부 문화가 학문의 시간을 지탱해 온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하버드대학교다. 하버드의 기부 문화는 특정 성과나 단기 목표를 전제로 하기보다, 대학이 스스로의 학문적 판단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고 장기적 연구와 교육에 투자할 수 있도록 신뢰를 부여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실제로 하버드는 기부금의 상당 부분을 영구 기금(endowment)으로 전환해 원금을 보존하고, 그 운용 수익만을 활용함으로써 학문과 교육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왔다. 소액 기부자부터 초대형 기부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기부자 기반이 층층이 형성된 이러한 구조 속에서, 기부는 개별 연구 성과를 지시하기보다 대학이 학문 공동체로서 오랜 시간 기능할 수 있도록 판단권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이처럼 신뢰에 기반한 기부 문화는 하버드가 세대를 넘어 세계 최고의 학문적 영향력을 유지해 온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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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공학관 로비 플로어에는 공과대학 건물 신축 당시 기부에 참여해 준 분들의 기념명패가 길게 자리하고 있다. 장창현 회장은 당시에도 공과대학 발전기금 3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장창현 회장의 이번 기부는 신소재공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대학교 전반의 다양한 학문 분야에 몸담은 구성원들에게도 하나의 메시지를 전한다. 연구는 개인의 성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산업을 거쳐 다시 다음 세대로 환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누군가의 신뢰가 자신의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는 경험은 훗날 또 다른 책임과 환원의 형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국제적으로 의미 있는 평가를 받아온 우리 대학교 신소재공학은, 이번 기부를 계기로 연구와 교육의 깊이를 한층 더 확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대학은 지식을 생산하는 기관이자, 시간이 축적되는 장소다. 이번 기부는 연세대학교가 어떤 시간을 품고 있고, 또 어떤 시간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특정 학과를 넘어 연세대학교 전체의 연구와 교육 생태계가 이 기부를 계기로 더 긴 호흡의 사유와 투자를 가능하게 한다면, 그때 이 기부는 비로소 금액을 넘어선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는 연세대학교의 연구와 교육을 한층 끌어올리는 마중물처럼, 조용하지만 오래 남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