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못하는 인간과 벌거벗은 생명 ― 스트럴드브러그와 호모 사케르를 통해 본 고령화 사회의 생명정치

서종희 교수 / 법학전문대학원
  • 202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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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의학, 생명과학 그리고 복지 제도의 발전을 통해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수명 연장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수명의 증가는 동시에 새로운 질문을 낳는다. 오래 사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인가?

 

우리는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 등장하는 스트럴드브러그(Struldbrugg)를 통해 현재 우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스트럴드브러그는 러그낵(Luggnagg) 왕국에 거주하는 독특한 인간 집단이다. 그들은 죽지는 않지만 계속 늙어가는 존재이며, 이로 인해 치매 및 만성질환의 병을 가진 존재로 사회적인 짐으로 취급되어 결국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고통 속에 생존만을 지속한다. 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80세), 죽은 것으로 간주돼 그 이후에는 어떠한 법적 거래(신용거래, 토지매입 등)를 할 수 없으며 법의 보호대상에서 제외된다. 또한 부부 모두가 80세 이상이 되는 시점에 이들의 혼인은 종료된다.

 

이 불사의 존재들은 행복하지도 않고, 사회에 유익하지도 않다. 그들은 인간적인 공포와 질병에서 해방된 존재가 아니며, 아무리 오래 살아도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 짐이 될 뿐이다. 스위프트는 스트럴드브러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를 통해 영생을 꿈꾸는 인간적인 열망조차도 자신의 한계를 망각한 오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에 대한 스위프트의 묘사는 너무나도 음울하고 부정적이며, 걸리버의 소박한 기대가 좌절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정서는 매우 염세적이다. 이 작품에서 스트럴드브러그의 설정은 인간 욕망에 대한 철학적 풍자이다. 즉 스트럴드브러그라는 죽지 못하고 끝없이 늙어가는 존재를 통해, 영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풍자한다. 스트럴드브러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법적·사회적 쟁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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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삶이 더 이상 인간다운 의미를 가지지 못할 때, 생존을 계속 강제하는 것이 정당한가? 스트럴드브러그의 비극은 단순한 노화가 아니라, 삶을 끝낼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이는 오늘날 의료 기술이 만들어낸‘“죽지 못하는 삶’의 문제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스트럴드브러그는 생명 연장이 곧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주며, 고령화 사회에서 인간이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할 위험과 죽음 선택의 문제를 동시에 드러낸다. 오늘날 논의되는 ‘죽을 권리(right to die)’ 혹은 존엄사 문제와 연결된다. 상속시점을 늦추기 위해서 연명치료로 생물학적인 생존을 늦춰 죽음의 시점을 통제하는 것이 타당한가? 연명치료를 통해 그들이 원하지 않는 삶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특히 국가가 생명정치(biopolitics)를 통해 누군가의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통치하는 것이 타당한가? 치매 등으로 인해 본인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생물학적인 삶을 계속하게 하는 것을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을 잊어버린 채 과거와 현재에 단절되어 살아가는 환자에게 생존을 연장해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것이 과연 환자를 위한 결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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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근대 정치가 점점 삶 그 자체를 통치의 대상으로 삼는 체제, 즉 생명정치로 변모했다고 분석한다. 이 정치는 개인의 삶에서 죽음에 대해서도 통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존엄사, 연명의료 중단, 자기결정권에 기반한 삶의 종료와 관련된 고리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우리는 풀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죽음은 삶의 적이 아니라, 삶을 완성시키는 요소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은 긴장과 의미를 갖고, 선택은 가치가 있으며, 시간은 소중해진다. 죽음을 잃어버린 스트럴드브러그는 자신이 누군인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조차 잊어버린 채, 사회로부터 격리돼 고독과 질병에 의한 고통을 반복적으로 계속하지만 심해지는 시지푸스의 비극보다 더 잔인하고 음울한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없는 삶의 종착지를 보여주는 스트럴드브러그는 우리에게 죽음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유한한 삶이 가지는 소중함을 느끼게 하며 하루 하루의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더 찬란하게 빛나게 한다. 

 

셋째, 우리는 세대 간의 대화 단절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스트럴드브러그가 생활하는 러그낵의 언어는 항상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한 세대 전의 스트럴드브러그와 다음 세대의 스트럴드브러그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두 세기가 지나면 대화의 단절로 서로 이야기도 나눌 수 없어 그들의 삶은 더 고독하고 음울하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현재 우리나라의 세대 간 양극화는 미증유(未曾有)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나이의 격차에서 발생할 수도 있으나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발생하는 격차에 의해 대화와 소통이 단절될 수 있다. 고령자가 디지털 취약층이 되어 사회에서 점점 소외되는 현상은 러그낵의 언어의 변화로 인한 결과에 다르지 않다.

 

넷째, 스트럴드브러그는 러그낵에 있는 자가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현대 고령화 사회에서도 생명 유지 기술은 계속 발전하지만 삶의 질은 유지되지 못하는 경우가 증가하며, 그들을 위한 연금은 공동체의 사회적·경제적 부담으로 인식된다. 그 결과 노인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돌봄시설로 격리돼 노쇠한 채 의료 시스템에 의존하며 생존을 장기화하고 있다. 인간다운 삶과 단순 생존 사이의 괴리는 고령자를 공동체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이동시키고, 점차 관리와 보호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자로 취급한다. 이는 아감벤이 말한 생명정치적 통치의 영역과 겹쳐진다. 아감벤이 말하는 단순한 생물학적 생존으로 남겨진 삶(bare life), 즉 벌거 벗은 생명으로서 언제든 살해당할 수 있지만 제물로 바쳐질 수는 없는 존재(호모 사케르)가 바로 스트럴드브러그이고 고령화사회의 고령자들의 미래의 모습일 수 있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지만 사회적 권리와 공동체적 의미를 상실하며, 점차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즉, 살아 있되 완전한 시민적 삶에서는 배제되는 존재가 된다. 스트럴드브러그는 벌거벗은 생명으로의 하강을 보여주는 문학적 모델이라 할 수 있으며 미래사회의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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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의 ‘최후의 인간(The Last Man)’이 신의 죽음 이후 건강을 새로운 여신으로 선포한 것처럼, 현대사회에서 건강은 인간의 중요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현대사회의 노인(고령자)은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장기간 생존할 뿐, 법의 보호 바깥에 놓인 자에 불과할 수도 있으며 누구보다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위프트가 스트럴드브러그를 통해 '죽지는 않지만 계속 늙어가는 인간’을 설정한 것은 오늘날 고령화 사회가 겪는 구조적 문제와 놀라울 정도로 맞닿아 있다. 스위프트는 스트럴드브러그를 '가장 가혹하고 굴욕적인 생물학적 쇠퇴’에 종속된 불멸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고령화를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결국 러그낵의 ‘스트럴드브러그’를 소환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고령화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노년층이 스스로 건강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법·제도를 통해 권리를 박탈하고 배제시켜 ‘살아 있으나 사회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처럼’ 취급할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해 건강수명 연장, 노령인구의 경제활동의 보장, 노년의 삶의 질을 제고시켜 그들에게 권리를 더 부여하고 사회의 중심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