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진단, 다른 판결”, 의료 기록을 중심으로 바라본 법정 내 피의자와 피해자 간 구조적 불평등
- 2025.12.05
[사진. 박주현 교수]
언론 보도를 통해 성범죄 재판에서 피고인 또는 피해자가 정신과 진료기록을 제출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정신과 기록이 성범죄 재판에서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변수가 되는 가운데, 사회학과 박주현 교수는 이 기록이 법정에서 활용되는 방식에 주목했다. 그 결과, 동일한 정신과 기록이 피고인에게는 ‘정상참작 요소’로, 피해자에게는 ‘사건 기각 여부를 좌우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특히 피해자의 정신과 기록이 역설적으로 성폭력 피해 사실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도 확인됐다.
이번 연구는 박주현 교수가 이전에 수행한 연구들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박 교수는 과거 성폭력 상해가 법·의료 영역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 특히 법정 판결에서 피해자의 의료기록이 어떠한 의미로 해석되는지를 분석한 바 있다. 박 교수는 “이번 연구는 그 연장선에서 피해자뿐 아니라 피고인의 의료기록이 법정에서 어떻게 제출되고 해석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 양측 사이의 차이를 규명하는 데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에는 물리적 상해 기록이 주로 활용됐다면, 최근에는 정신질환 관련 기록의 비중이 커지고 있어 이 변화 역시 연구 설계에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연구에는 2013년부터 2023년까지의 강간 재판 판결문 821건을 분석한 자료가 활용됐다. 충동조절장애, 조현병, 양극성장애, 공황장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다섯 가지 정신질환을 중심으로 판결문의 수집이 이루어졌다. 박 교수는 각 판결문에서 진단명, 시기, 법원의 해석 맥락 등을 분류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혼합연구(mixed method)가 진행됐다. 박 교수는 “연구 전반은 질적 방법론을 중심으로 문헌을 심층 분석했고,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양적 분석을 병행했다”고 설명했다. 즉 법원의 해석 패턴을 통계적으로 도출하는 한편, 대표 판례를 질적으로 검토해 정신질환이 법정에서 어떤 서사와 논리 속에서 해석되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정신질환이 ‘책임을 낮추는 근거’로 작동하는 경우와 ‘진술 신빙성을 약화하는 근거’로 작동하는 경우의 구조적 차이가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연구에 따르면, 정신질환 진단은 피고인과 피해자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었다. 피고인의 경우 조현병, 양극성 장애, 충동조절장애 등의 진단은 범행 당시의 심신미약이나 치료 가능성 등을 근거로 형량을 감경하거나 보호감호 처분을 유예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반면 피해자의 경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나 공황장애 진단은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제출됐음에도, 법정에서는 진술 신빙성을 의심하는 근거로 재해석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이러한 불균형은 허위 고소가 제기된 경우 더 심화됐다. 성범죄 사건 이후 일부 피고인들이 피해자를 대상으로 명예훼손이나 무고죄로 역고소를 제기하면, 피해자의 정신과 기록은 본래의 피해 증거가 아닌 허위 진술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전환된 사례가 확인됐다. 이처럼 동일한 의료기록이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현상은 박 교수가 ‘법적 환자(legal patient)’라 명명한 구조적 문제의 단면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번 연구는 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와 피고인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 불평등을 실증적으로 제시하며, 법정 내 의료기록 해석 방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함을 제기한다. 아울러 법과 제도가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법정 속 구조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박주현 교수는 “현재 한국 재판부가 채택하고 있는 법정 모델의 한계를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며 법정 내 피해자 보호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촉구했다.
기사 작성: JSC 윤현서(사회학 25)·한준희(시각디자인 21)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