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에 담긴 무한한 시간
- 2026.04.20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담아낸다. 찰칵하는 셔터 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며 최고의 한 컷을 잡아내야 하는 사진가는 순간의 몰입도, 예민한 감각, 섬세한 관찰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사진은 단순히 현실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진가의 시각, 판단력에 따라 무한한 서사가 펼쳐지기도 한다. 피사체의 감정 속에 그의 삶의 궤적이, 이면의 페르소나가 겹치기도 한다. 어떤 연출로, 어떤 관점으로 포착하느냐에 따라 깊이가 달라진다. 조선희 동문은 그렇게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에 무한의 시간을 담아낸다. 오랜 시간 패션, 광고계의 대표적인 사진가로 활약해 온 그는, 이제 사진 속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그 무한의 시간을 확장해 가고 있다.
예술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린시절부터 특별한 재능을 발견하거나 확고한 꿈에서 시작되곤 한다. 조선희 동문 역시 그러했을 것 같지만, 그의 꿈은 의외로 과학자였다.
“공부를 좀 한다는 친구들은 대부분 과학자, 법관 등 전문직을 꿈꾸잖아요. 저 역시 그랬어요. 과학자가 되고 싶었고, 이과를 선택했죠.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공부를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사실 고2 때 카이스트 입학시험을 봤는데 떨어져서 충격을 받기도 했어요. 꼭 서울로 대학을 오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연세에 입학하고 싶었죠. 다른 학교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요. 다행히 입학할 수 있었고요. 사실, 그때는 아무것도 깎이지 않은 날 것 그대로였던 때라, 제가 지금보다 더 기가 세지 않았겠어요? 연세는 좀 터프한 문화는 아니니까, 간혹 선배들이 다시 시험 봐서 다른 학교(K대) 가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어요. (웃음)”
조선희 동문의 대학시절 대부분의 많은 추억, 값진 시간은 사진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 준비 때문에 좋아하던 선생님이 만든 사진 동아리에 들어갈 수 없었던 그. 대학 입학 후로 미뤄뒀었다. 덕분에 남들처럼 동아리 선택에 고민은 없었다.
“모든 게 저는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좋아하던 고등학교 선생님이 만든 사진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부모님도 그렇고 주변에서 공부에 방해된다며 다 반대하셨죠. 이제 대학생이 됐으니 사진 동아리에 꼭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학생회관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 동아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마침,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알게 된 과 동기 서수민 PD를 만난 거예요. 그 친구가 사진 동아리에 들었다며 길을 안내해 주었죠. 학생회관 구석의 복도 끝을 꺾어 들어가는 곳에 있더라고요. 드디어 사진 동아리 ‘연영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됐죠.”
사진 동아리를 하면서도 본격적으로 전문 사진작가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그저 취미에서 시작했고, 되돌아보면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 사진을 찍어주며 연출하는 것을 즐겼다는 것, 무의식적으로 사진작가의 일에 흥미를 가졌다는 게 전부였다. 기대를 안고 들어간 동아리 활동은 한편으로는 어렵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사진의 세계를 알아가는 일이 흥미로웠다.
“사진을 배우는 과정이 무척 하드했어요. 커리큘럼이 엄청 빡빡했죠. 매주 시험을 봐서 1등을 하면 필터 같은 것을 선물 받기도 하고, 일요일에 촬영하고 수요일까지 현상해서 밀착 작업까지 직접 했어요. 일정을 못 맞추면 혼나기도 했죠. 준비해야 할 전시회도 많았어요. 게다가 다큐멘터리 사진을 주로 했는데 그게 저랑 잘 맞지 않았어요. 사회 고발, 다큐멘터리 정신, 기자 정신은 별로 없었던 거죠. (웃음) 동아리 활동할 시간이 빠듯해서 학과 공부는 할 시간이 거의 없었죠. 제가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는 건 미스터리였어요. (웃음)”
조선희 동문은 다큐멘터리와 맞지 않아서 힘들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사진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시간도 가졌다.
“어느 순간 죽음에 대해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자 모델을 구해서 촬영을 했어요.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제 모든 것은 죽음에서 출발하거든요. 1984년,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죽음이 무엇인지, 사람이 왜 살고 죽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왔거든요. 죽음에 대한 집착이 그때부터 시작됐고, 현재 작품의 주제와도 연계되죠. 당시 연세문화상(1993)을 받은 포트레이트는 할머니의 사진을 찍은 거예요. 할머니가 죽음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제 눈에 보인 거죠. 또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염하는 사진을 찍기도 했어요.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사진을 찍고 있다고 삼촌들에게 욕을 많이 먹기도 했어요.”
유순덕 - 사라지는 시간(1992), 연세문화상(1993) 수상 ⓒ조선희
그렇게 조선희 동문의 대학 시절은 온통 사진과 함께였고, 졸업을 앞둔 시점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에 써낼 수 있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의 리스트 첫째 줄에는 사진 외에는 없었다.
“진로를 고민하며 5개 정도 리스트를 적어보려 했어요. 그런데 1번 사진을 적고 나니 더 이상 적을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을 해야겠다 생각했죠. 대학교 1학년 때, 전시회 준비를 위해 동아리 1학년 회원들이 하나의 주제로 사진을 찍는 일이 있었는데, 개개인의 이름을 걸고 하는 전시가 아니라 연영회 25기 기수 이름을 걸고 하는 전시였어요. 그때 주제가 ‘기차를 움직이는 사람들’로 기차와 관련된 사람들을 찍었는데, 대전에서 기차를 수리하는 정비창에서 촬영을 하게 됐어요. 한 분이 기차 아래 들어가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렌즈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단렌즈 하나 들고, 니콘 FM2로 찍었어요. 아저씨가 움직이면 안 되는데, 하면서 초점과 노즐을 수동으로 맞추면서요.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분이 가버릴 것만 같고 액션을 안 할 것만 같아서요. 그렇게 순간, 찰칵하고 찍는데, 그 셔터 소리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때 이 소리를 평생 듣고 사는 것도 참 멋진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죠. 그 기억도 나면서 자연스럽게 사진을 계속하게 됐어요.”
사진작가로 진로를 정했다고 해도, 전공한 것도 아니고 필드에 선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막막한 상황. 당시 연영회 선배이자 유명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김수남 사진가의 어시스턴트로 잠시 일을 하며 만났던 이들에게 사진작가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 유학을 갔다 잠시 들어온 동아리 선배를 통해 사진가로서의 커리어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사실 그 선배는 저를 잘 모르지만 연락을 해서 제가 작업한 것들을 보여줬어요. 그랬더니 제게 너는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일단 사진을 하고 싶다, 그런데 돈은 벌어야 한다고 했더니 패션, 광고 사진 분야에서 유명한 김중만 선생님 밑에서 일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김중만 선생님 사진풍과 비슷하다고요. 소개해 줄 거냐고 했더니, 전화번호를 줄 테니, 직접 어플라이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추천 없이 어딘가에 직접 어플라이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어요. 선생님께 직접 전화를 해야 하는데 내일 해야지, 하며 하루하루 미루던 차에 어느 날 밤 12시에 김중만 선생님이 제게 전화를 하신 거예요. 연락한다더니, 왜 연락이 없냐면서요. 내일까지 포트폴리오 준비를 해오라 하셔서, 준비해 두었던 것을 가져갔어요. 까맣게 물들인 한지에 사진을 직접 프린트해서 붙여 갔는데, 오히려 혼났죠. 멋있는 척하지 말고, 사진은 사진으로만 승부를 봐야 한다고요. 이틀 후까지 30장을 다시 프린트해 오라고 해서, 이틀 밤을 새워 다시 해 갔죠. 보시고는 알겠다 하곤 끝이었어요.”
이후 한 달 즈음이 지났을까. 아무런 소식이 없던 김중만 작가로부터 갑자기 연락을 받은 조선희 동문. 그에게 떨어진 미션은 한 가수의 콘서트장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 호텔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급하게 달려갔던 조 동문에게 큰 삼각대 하나가 주어졌다. 삼각대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모르는 초짜였던 그에게 당혹스러운 일들이 계속됐다.
“정말 엄청 큰 삼각대를 주고 설치하라고 하는데, 아무리 풀어도 어떻게 풀리는지 알 수가 없고, 너무 커서 열리지도 않는 거예요. 이런 저를 보고는 주변의 카메라 기자들이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큰 걸 가지고 다니냐며 도와줬죠. 그렇게 설치를 다 하니 선생님이 카메라 하나를 주면서 ‘네가 좀 찍어봐’라고 하시더라고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반자동 카메라였죠. 필름을 갈아야 하는데 어떻게 여는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선생님도 찍고 계시는데 어떻게 여는지 물어볼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단 한 롤만 찍었죠. (웃음)”
그렇게 약 4년간, 조선희 동문은 김중만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본격적으로 상업 사진작가의 현장을 경험하게 된다. 무보수에 비정기적인 일이었기에 시사잡지 인터뷰, 광고 등의 촬영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활동했다.
1998년 조선희 동문은 자신의 스튜디오를 오픈한다. 오픈 전까지는 다른 사람의 스튜디오를 빌려 쓰곤 했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들이 많았다. 한 번은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잡혀 있었지만 막상 가 보니 빌린 스튜디오가 닫혀 있어 순발력을 발휘해야 할 때도 있었다.
“가수 패닉을 촬영하기로 했는데, 스튜디오 문이 잠겨 있는 거예요. 스튜디오를 빌려주기로 한 사람은 연락도 안 되고요. 그런데 찍긴 찍어야 하잖아요. 급하게 다른 장소를 물색하다 근처의 패밀리레스토랑이 생각났어요. 거기 화장실이 화이트와 블랙 타일로 무척 모던하게 몬드리안 작품처럼 장식돼 있거든요. 거기서 찍으면 괜찮겠다 싶어서 화장실에서 촬영했죠. 인터뷰이들에게 실험적이지 않냐며 설득하기도 했죠. (웃음)”
사실 스튜디오 오픈 전, 조선희 동문은 그간 모은 돈으로 유학을 위해 뉴욕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IMF가 터졌고, 당시의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스튜디오를 차리기로 했다. 유학 비용으로 쓰려던 돈으로 촬영 장비를 샀고, 스튜디오를 오픈했다. 주변에서는 다들 스튜디오를 접는 분위기라며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조 동문에게는 기회로 보였다. 경제 위기로 스튜디오 월세가 낮아졌기 때문. 하지만 오픈한 지 1년 여간은 일이 많지 않았다. 힘든 시기였다. 스튜디오 월세에 어시스턴트 월급에 나갈 돈은 많아 마음이 더 힘들었다.
“그전까지 제가 주로 인터뷰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닉네임이 인물 사진을 많이 찍는 사진가였죠. 그런데 그런 닉네임을 얻고 나니, 그 일만 하게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당분간 인터뷰 사진은 찍지 않기로 했죠. 거절하니 어떤 기자는 제게 많이 컸다며 서운해하기도 했죠. 다른 일을 좀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마침 알던 기자 한 명이 패션 매거진은 약간 다른 분야이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더라고요. 처음엔 잘 안됐어요. 당시에는 포토그래퍼가 자유롭게 콘셉트를 정해서 촬영하는 문화였는데, 제 콘셉트는 너무 거칠고 실험적이었던 거죠. 패션은 실험적이어도 세련됨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렇게 시작하며 하나둘씩 늘어가다 보니 엘르, 보그, 바자와 같은 글로벌 패션 매거진의 인터뷰 사진도 찍게 되었어요.”
조 동문이 원했던 것은 단편적인 인터뷰 사진이 아닌, 인터뷰이의 내면과 여기에 그만의 해석과 색이 입혀진 입체적인 작품이었다. 그의 카메라를 통해 단순히 예쁘고 멋진 피사체가 아닌, 개성과 서사, 페르소나가 있는 사람, 스토리와 감성이 녹아든 하나의 장면, 순간이 포착된다. 한국 패션 매거진 전성기의 존재감 있는 작가로, 조선희 동문의 스타일이 하나의 강렬한 포트레이트 장르로 꼽히는 이유다.
조선희 동문은 패션 매거진뿐만 아니라 광고 사진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 역시 자리 잡기까지 시작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조 동문은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그의 실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의 한 컷을 포착했다.
“월세 내기도 힘든 시기에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에티오피아에 가서 한 배우와 함께 패션 브랜드 화보 촬영을 해야 하는 것이었죠. 다른 스태프들은 모두 먼저 가 있었기 때문에 저 혼자 비행기 세 번을 갈아타고 가야 했어요. 공항에 내려서 양, 닭을 실은 택시를 타고 갈 정도로 호텔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었죠. 도착해 보니 호텔에선 한국인은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일단은 기다려보자, 하고 시장 구경도 하고 돌아다니다 이틀 정도 지나고서야 호텔 로비에서 그 배우를 만났죠. 순간 안도의 눈물이 나면서 제가 막 주저앉아서 울었어요. 그때 한 방송국 프로그램을 찍으러 간 건데, 방송국 쪽에서는 제가 가는 줄 모르고 촬영 시간을 연장해서 늦어진 것이었죠. 결국 서로 자초지종을 알게 돼서 나중엔 제 촬영에도 운전사 가이드까지 지원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죠. 그 브랜드가 클럽 모나코였는데, 그때 찍은 사진 중 한 컷이 갤러리아 백화점 외벽에 크게 걸렸어요. 그리고 몇 달 후에 다른 브랜드 지오다노에서 의뢰 전화가 왔죠.”
새로 컨택해 온 브랜드로부터 그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찍은 촬영비의 10배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브랜드는 광고로 단지 몇 컷만 사용하는 게 아까워 조 동문이 찍은 사진들을 사진집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조 동문은 광고계에서도 각광을 받게 된다.
인물, 패션, 광고 등 많은 상업 사진 분야를 경험하고 최고의 자리까지 성장하면서 그는 지친 적이 없는 것 같다. 오지까지 가는 길고 험한 출장길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시간 외에는 단 한순간도 쉰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뷰파인더 속 피사체에 시선을 두고 그가 원하는 한 컷, 그 순간을 위해 몰입한다. 그 많은 에너지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그저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죠. 한 번은 인터뷰 사진을 찍으러 갔는데 기자가 사진을 먼저 찍고 갈 거면 가도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터뷰를 다 듣고 어떻게 찍을 것인지 얘기하겠다고 하니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고요. 저는 인터뷰에 몰입하면서 인물 스토리에 대해 알고 그걸 사진으로 어떻게 풀어낼지 생각하거든요. 기자가 나중에 저 보고 되게 특이하다면서, 보통은 먼저 찍고 간다는 거예요. 저는 먼저 간다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그때는 카메라를 만지는 사람이 사진가밖에 없었잖아요. 필름이니까, 단 한 컷의 아웃풋을 잘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죠.”
인터뷰를 위해 찾은 조선희 동문의 조아조아스튜디오. 개성 강한 그답게 톡톡 튀는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소품들이 눈에 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 동양화 한 폭을 보는 듯한 병풍 구성의 작품이 무게감 있게 놓여 있다. 최근 조 동문은 상업 사진보다는 순수 사진에 몰입하고 있다.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다.
“사실 원래 순수예술을 하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께서는 대학을 졸업하면 제가 다 벌어야 한다, 늘 독립심을 강조하셨어요. 돈을 어떻게 벌지 생각했을 때 월세, 식비, 필름비 등을 생각해 보니 최소 60만 원 정도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꿈이 60만 원 버는 사진가였어요. 그러면 사진을 포기하지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돈을 벌 수 있는 상업 사진들을 많이 찍긴 했었지만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작업하고 싶은 욕구가 늘 있었죠. 개인적으로 죽 작업을 해오긴 했었어요. 요즘은 상업 사진은 거의 접은 상태인데, 병행을 하기가 쉽지 않아요.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하거든요.”
지난 2022년 조선희 동문은 오랫동안 준비한 첫 번째 순수 사진전 ‘姬(희): 나는 우주다’를 열었다. 최장 30년간 말린 꽃을 찍은 사진들로, 꽃이 시들어가며 변형되는 시간, 삶에서 죽음으로 다가가는 순간을 그의 방식으로 재창조해 포착한 사진들을 선보였다. 전시회를 열기 오래전부터, 상업 사진과 병행하면서 시작한 것이었지만, 작품의 콘셉트와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까지는 10년 이상이 걸렸다.
“선물 받은 꽃들을 그 마음이 좋아 말려두다가 찍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저 꽃 사진일 뿐이었죠. 단순히 아름답게 찍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내 사유가 온전히 녹아들지 못했다면 어디에도 내놓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예전에 찍은 할머니의 염하는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 할머니가 화장을 한 모습이 무척 고운 거예요. 그래서 내 꽃에도 화장을 시켜줘야겠다. 즉, 염을 해줘야겠다 싶어 형광 안료를 뿌려 아름답게 부활시켰어요.”
姬(희): 나는 우주다, 2022 ⓒ조선희
최근 전시인 ‘프로즌 게이즈(Frozen Gaze)’의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로 죽음,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사유가 온전히 그만의 작품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어느 날 땅에 떨어져 죽어 있는 새를 보고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떠올렸다는 조선희 동문은 그 새를 어쩌지 못하고 물에 넣어 얼린 후 사진으로 기록했다. 얼린다는 행위를 통해,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얼어붙었던 자신과 마주하고 그 내면의 감정을 응시한다. 이후 로드킬 당한 새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얼려 촬영했다.
“꽃에 화장을 시켜줘야겠다, 죽은 새를 얼려야겠다 하는 생각은 매우 사소한 생각인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 생각을 하는 데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리는 거죠. 왜 화장을 하고, 얼리는지 그 사유가 중요한 것이죠. 잠시라도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고 싶고, 아름답게 생명을 다시 불어넣고 싶다는 마음이 투영된 것이죠. 아버지는 그냥 떠나보냈지만, 전이된 대체물인 거죠. 이런 생각을 하는 과정들이 오래 걸리는 일이고 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내는 일이에요. 2017년에 157일간 세계 일주를 한 적이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사진을 많이 찍었겠어요. 그런데 그 사진들은 하나도 이 개념에서는 작품이 될 수 없어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일 뿐이고, 사유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 깨달음을 얻고, 2018년부터 작업을 조금씩 시도하다가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꽃과 새 작품을 시작했어요.”
순수 작품을 시작하며 초기에는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사유를 발전시키는 과정이나 방법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서툴렀다. 그래서 그는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미학을 공부하며 자신이 왜 이러한 작업에 천착하는지, 어떤 내면의 투영인지 등 스스로에 대해 다시 들여다보며 순수예술 작가로서 한 걸음씩 나아갔다.
Frozen Gaze, 2025-2026 ⓒ조선희
그의 작품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바로 ‘회화적’이라는 점이다. 처음 얼핏 보면 사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전혀 리터칭을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더욱 놀랍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방식 역시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작가로서 의도한 것이다.
“우리 눈은 3차원, 입체적으로 보잖아요. 거리감도 느낄 수 있고요. 그래서 사진도 공간감, 원근감 등 최대한 사람이 보는 그대로 구현하려고 해왔죠. 그런데 사진은 원래 평면이에요. 사진이라는 2차원의 세계에 피사체를 담으려고 했죠. 그래서 저는 발상을 바꿔 꽃을 다 세워서 찍고 공간감을 없앴어요. 1:1로 사람의 초상을 찍듯이 꽃을 공간감 없이 찍은 거예요. 공간감도, 현실성도 없이 사진의 본질, 2차원의 세계를 구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또 무척 디테일한 부분까지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회화적으로 보이는 것이죠.”
조선희 동문의 깊은 사유를 담은 작품들을 전시관에서 관람한 이들은 눈앞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작품들이 말을 건네는 것 같다는 평을 한다. ‘꽃은 시들었으나 춤추는 듯 생동감이 있고, 얼린 새에서는 얼음 사이의 기포, 균열 사이로 숨결이 느껴진다. 덕분에 오랫동안 작품 앞에 머무르게 된다.
조선희 동문은 자신의 작업을 늘 발전시키고 확장하고 변화시킨다. 작업에 완전한 완결은 없다고 말한다. 하나의 영감에서 시작된 작업은 또 다른 영감, 아이디어와 결합해 새로운 맥락과 형태로 발전하기도 하고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면서 다음으로 나아간다. 얼린 새 작품을 한지에 프린트하고 덧입히고 불에 그을리고 염색해 아버지의 병풍에 입혀 만든 작품에서, 나이 들어 육화되어 가는 어머니의 몸 사진을 한지의 질감을 살려 프린트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어머니의 몸 시리즈는 현재 진행 중인 작업으로 작업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머니의 몸 사진과 더불어 중력의 영향을 받으며 말라가는 과일이 새로운 형태감을 만들며 변화하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우주의 행성처럼 표현한 작품 플래닛 시리즈도 작업 중이다. 이 전시는 오는 6월, 국제갤러리에서 구본창 동문(경영학 71)이 기획한 단체전 ‘Planet’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지난가을부터 올해 초까지 뮤지엄한미 삼청별관에서 선보인 전시에 이어 오는 5월 8일부터 6월 6일까지 대구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또 다른 얼린 새를 소재로 한 전시 ‘Frozen Gaze-잉여의 시간’을 선보이는 것도 마찬가지. 수많은 순수예술 작가들이 그래왔듯, 조선희 동문의 작품 세계는 조금씩 더 깊어지고 확장되고 초월한다.
조선희 동문은 성공한 상업 사진가로서 많은 것들을 이뤘다. 그리고 순수 작가로서의 새로운 시도와 작품성 또한 인정받고 있다. 최근 그가 어린 시절부터 챙겨보던 대표적인 사진 전문 매거진 <포토아트>에 조 동문의 작품이 표지로 실렸다. 동경했던 일이었기에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상업 사진과 순수 사진, 순수 예술과 사진을 가르는 고정된 잣대를 경계한다. 또한 작가로서 어떠한 틀에 갇히는 것도 경계한다.
“순수 예술과 사진 예술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나는 사진을 하나의 예술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이고 화가는 그림을 예술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이죠. 단지 도구의 차이일 뿐인데 갈라놓는 것은 이상한 일이에요. 또 제가 순수 작업을 하면서 디지털이 아닌,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거든요. 왠지 그래야 더 예술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어떤 기획자가 그러더라고요. 현대 매체를 잘 이용하는 사람이 진정한 현대 아티스트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제 고민에 대한 숙제가 확 풀린 듯했어요. 필름에 대한 미련을 확실하게 버릴 수 있게 됐죠. 저 역시 ‘그래야 한다’는 틀과 강박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또 조선희 동문은 작가로서의 지구력을 잃지 않기를 소망한다.
“무언가 일주일에 하나라도 찍으려고 하죠. 그래야 이번 주도 좀 괜찮게 살았구나 싶거든요. 안 그러면 주말이 우울해져요. 사실 순수 작품을 하면서 깨닫게 된 건 젊은 사람들은 순수 사진을 하기 힘든 구조라는 거예요. 예술 작업이라는 것이 대략 10년은 걸리거든요. 제가 2018년 얼린 새와 관련한 작업을 처음 시작했고, 전시는 2025년이었으니 8년 만이었잖아요. 다들 빠른 편이라고 해요. 그 시간을 버티려면 지구력을 잃지 않아야 해요.”
자신의 삶과 내면 속 경험, 감정들이 축적된 작업들을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조선희 동문은 단순히 사진작가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자신의 철학, 태도, 작업이 내재화되어 있는 듯하다. 예술가로서 그는 매일매일 다양한 영감 속에서 새로운 꿈을 써 내려 가고 있다.
“바람이 있다면… 10년쯤 후에는 세계적인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예술을 한다는 것이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만이지, 꼭 유명해져야 하나 싶기도 하겠지만, 제가 작품을 하는 이유가 저 혼자 보고 좋자고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내 이야기를 전하고, 함께 느끼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유명해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조선희 동문은 스스로 고정관념 없이 사진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기성의 시선으로 정형화되고 다듬어지지 않은, 자신의 거칠고 날 것 같은 세계가 오히려 새로움으로 각광받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모든 새로운 영감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다양한 영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감을 이끌어 내는 천재성을 발휘하고 있다. 삶 속에서 죽음을, 죽음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메시지와 어우러지는 시각적 아름다움 그 자체로 예술을 한다. 그렇기에 세계 곳곳의 갤러리에서 그의 새롭고 아름다운 작품 앞에 더 많은 공감과 사유의 시선이 머무를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