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을 넘어 지평을 넓히다: ‘최초’가 아닌 ‘최선’의 길을 개척한 지적 여정
- 2026.01.20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에서, 오직 자신만의 굳건한 신념과 탁월한 통찰력으로 지평을 넓혀온 이가 있다. 남성 중심의 견고한 영역으로 여겨졌던 국방과 안보 분야에서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이끌며 외부의 시선에 흔들림 없이 혁신의 이정표를 세워온 최현수 동문. 그의 행보는 단순한 개인의 성공을 넘어, 진실을 향한 치열한 탐구와 흔들림 없는 신념이 어떻게 사회의 고정관념을 깨고 가능성의 지평을 확장하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때로는 날카로운 펜으로 시대를 기록하고, 때로는 단호한 목소리로 국익을 수호하며 한계를 넘어선 최 동문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능성과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가치를 실현해 온 그의 지적 여정을 함께 회고해보자.
어린 시절, 최현수 동문은 프랑스대사관 근처에 살았다. 가끔씩 대사관에서 열리는 소란스러운 행사들을 담 너머 지켜보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때로는 진지하고 때로는 화려하고 흥겨웠다. 그때부터 어렴풋이 외교관이라는 직업에 대해 흥미를 가졌다. 중고등학생 시절의 최 동문은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의문을 가지고 해결 방법을 골똘히 생각해 보곤 했다. 그러한 성향과 관심은 자연스레 정치외교학 전공으로 이어졌다.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바꾸어 나가지?’ 고민의 답을 찾으려 책을 많이 읽었고, 책을 통해 또 사회 현상을 보면서 ‘사회적 문제는 정치를 통해서 더 빨리, 효율적으로 바꿀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위인전을 많이 읽었거든요. 그러한 이유들이 하나씩 쌓여 정치외교학과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대학 시절, 사회의 권력 구조라든가 정책 결정 과정이라든가, 각국의 국제 관계 속 국가 간의 길항작용 등 정치외교 분야에 대해 다양하게 배우면서 개인의 삶보다는 사회 체계나 구조, 힘의 역학 관계에 대해 많은 사고를 하게 됐습니다.”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꽤 진지했던 대학 시절이었다. 같은 과 동기들 몇 명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20세기 프랑크푸르트학파, 한나 아렌트 등 다양한 정치철학과 이론을 공부하며, 지식의 깊이도 더욱 깊어졌다. 단순히 책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진 동료 친구들의 시각을 통해 많은 지적 자극과 영향을 받았다. 연세에서 동기들과 함께, 서로 배웠던 그 모든 순간이 다 값지고 즐거웠다. 이런 시간들 속에 그의 진로도 방향을 바꿨다.
“처음에는 외교관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외무고시를 볼까 하다가 왠지 그게 너무 폭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죠. 동기들과 공부하면서 정치 이론 등에서는 크게 뒤지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사적 사건이나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회적 사안들에 대해서는 제가 동기들보다 모르는 부분도 많았어요. 이 부분을 스스로 보완하고 싶었어요. 어떤 일이 가장 좋을까 고민해보니, 기자는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알아야 보도하고 또 그 일이 갖는 의미도 공부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기자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최현수 동문은 언론고시를 준비했지만 아쉽게 낙방 후, 무역회사와 NGO 단체를 거쳐 크리스천 잡지사에서 일했다.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적성에도 맞고 꽤 재미있었다. 그러던 중 국민일보가 창간되며 잡지사 편집장과 함께 신문사에 합류하게 됐다. 그렇게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이어지면서 대학을 졸업하며 바랐던 일간지 기자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취재 기본기와 현장 감각을 갖춰야하고 다양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 기자 직군의 특성상 신입기자는 여러 부서를 거치게 된다. 최현수 동문은 국민일보 종교부에서 첫 근무를 시작해 국제부로 이동했다. 정치외교학 전공에 영어가 능통했던 최현수 동문에게 국제부 근무는 좀 더 특별했다. 낮은 연차에 국제부의 치열한 현장 한가운데에 놓였던 경험은 힘들었지만, 그의 성장에 큰 동력이 됐다.
“국제부의 경우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중요도 순서대로 연차가 높은 선배들이 담당을 해요. 당시 저 같은 초짜들은 중동이나 아프리카 쪽을 맡았죠. 이슈가 적어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기사 작성 연습을 하며 적응하는 시간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국제부에 들어가고 얼마 후 걸프전이 터진 거예요. 중동 담당이니 거의 매일 한 면 가까이 기사를 써야 하는 상황이었죠. 또 걸프전은 말 그대로 ‘전쟁’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전쟁에 관한 용어, 작전이나 무기체계 용어, 전쟁 관련 국제법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모두 이해하기란 어려웠어요. 물론 제가 쓴 기사가 완벽할 수 없으니, 남자 선배들이 손을 봐주셨지만 저는 좀 답답함이 느껴졌어요. 이 무기체계의 원리가 뭐지, 어떻게 작동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지, 뭐 이런 의문이 계속 쌓여갔죠. 외신 기사를 번역한다고 해도 제가 제대로 이해를 하고 쓰는 기사와 단순히 번역해 쓰는 기사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최현수 동문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 국방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다. 책도 보고 선배들에게 묻기도 했고 전문가를 찾아가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낯설기만 했던 군사 용어도 능숙해지고 전반적인 지식도 쌓였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은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현재 일어나는 사안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배경 지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지식과 통찰을 얻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가정 형편이 넉넉치 않아서 유학을 못 갔어요. 대신 기자라는 직업이 공부하는 것과 근접한 일이라 생각했고요. 국민일보에 들어간 지 6년 정도 후 국제부에서 일어나는 사안들을 쓰다 보니 정치, 국제 이론 공부가 뒷받침되어야 할 필요를 느꼈어요. 유학을 결심하고 일과 유학 준비를 병행했어요. 그때 너무 고되다 보니 막판에는 거의 허리를 쓸 수 없어 매일 물리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죠.”
힘들게 준비한 유학, 그는 미국의 명문 시카고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과정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사실 시카고대학교는 그와 인연이 있던 곳.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합격한 후 더 의미가 있었다.
“대학교 4학년때인가요, 시카고대학교에서 공부하셨던 여러 교수님들이 오셨고, 그분들의 이론이 우리 학계에서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어요. 막연하게 저런 명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또, 신문사에 들어와서 첫 번째 해외 출장이 시카고였죠. 당시 일을 마치고 시카고대학이 유명하니까 한 번 가 봤어요. 서점도 둘러봤죠. 당시에는 다시 올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서점 회원권을 30달러나 주고 사기도 했죠. 그러고 돌아와서는 잊어버렸는데, 석사과정으로 다시 가게 된 거예요.”
최현수 동문이 유학 간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는 줄여서 ‘U of C’로 불렸는데, C학점을 많이 주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혹독하게 공부시키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공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유학 시절은 무척 행복했다. 특히 최 동문은 전쟁사와 관련한 공부에 흥미를 가졌는데, 유명 석학들의 명강의로 배움의 폭과 깊이는 늘 풍성했다. 다양한 시각을 갖출 수 있는 강의들을 만나며 좀 더 입체적으로 국제 분쟁, 국제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네타 크로퍼드(Neta C. Crawford) 교수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과목을 통해 막연히 알고 있던 전쟁사의 다양한 분야를 알 수 있었고, 전쟁과 국가 형성의 길항관계를 다룬 ‘전쟁과 국가형성’, ‘남북전쟁’, ‘1차 세계대전과 미국’ 등 다양한 군사적인 주제를 다루는 강의를 수강하면서 국가 이익을 가운데 두고 이를 지키기 위해 발생하는 다양한 전쟁 양상, 전략 등을 공부했다. 특히 진 얼스타인(Jean Bethke Elshtain) 교수가 진행했던 ‘전쟁과 인간’은 매주 금요일 오후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보며 공부했는데, 한국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영화를 보면서 전쟁과 인간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군사적인 부분이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미국의 대표적인 현실주의 정치가 존 밀샤이머(John J. Mearsheimer) 교수의 강의는 철저하게 국익과 힘에 의해 움직이는 국제 질서에 대한 식견을 가지게 했다. 훗날 밀 샤이머 교수는 국방부 대변인 시절 한국 방문 시 만나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최 동문의 유학 시절은 정치외교적인 이론, 국제 관계 속에서도 전쟁, 군사 사안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된 시기였다. 원래 1년 예정으로 떠났던 유학길이었지만, 최현수 동문은 1년을 마무리하면서 제출한 논문 주제가 좋은 평가를 받아 1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한 해 더 공부한 후 다시, 기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최현수 동문은 국제부에 있다 정치부로 이동해 외교부를 출입하게 됐다. 정치외교와 국제관계를 공부한 그에게 너무도 잘 맞는 성장의 단계였는데, 신기하게도 가는 부서마다 일복이 넘쳤다. 남북외무장관 회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같은 큰 사건들에 이어 미국 911테러가 일어나면서 엄청난 이슈들이 많았다. 그렇게 수많은 일들 속에서 바삐 뛰어다니며 2년간 워커홀릭으로 보낸 후, 다른 부서로 이동해야 할 타이밍이 됐다. 가고 싶은 부서가 있느냐는 상사의 물음에 최 동문은 국방부를 선택했다. 사실 국방부의 경우에는 하나의 사건이라도 터지면 파급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전체를 핸들링하는 일이 무척 어려운 부서였다. 그래서 당시 국방부로는 경력이 많은 남자 선배들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신생 매체였던 국민일보는 다른 신문사들에 비해 새로운 시도와 도전에 다소 관대했기에, 최현수 동문에게 여성 최초의 국방부 출입기자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고민들이 많으셨겠죠. 국민일보는 아무래도 신생 언론사니까 여자라도 일은 꽤 잘하니 국방부에 일단 한 번 보내 보자는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한참 국방부에 출입하고 나서도 신문사에서 여기자들을 많이 보내기 시작한 건 조금 시간이 흐른 후였어요. 그런데 그 전까지 국방부에 여기자가 출입을 안 했다는 것을 전혀 몰랐어요. 첫 상주 여기자라고 하니까 저도 좀 긴장이 되고, 국방부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잖아요. 그래서 인터뷰를 오히려 제가 당하기도 하고 (웃음). 그때부터 ‘첫 여성’이라는 타이틀이 달리기 시작했어요.”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단 국방부 출입기자 시절은 녹록지 않았다. 브리핑을 들으며 모르는 점도 많았고, 무엇인가 손들어 물어보고 싶지만 여자 기자라, 군 복무 경험이 없으니 그걸 모른다고 할까봐 궁금증을 참기도 했다. 대신에 브리핑이나 보도자료 화면이 끝나면 대변인에게 가서 궁금한 점에 대해 묻거나 각 군에서 파견한 공보 장교에게 물어 설명을 듣곤 했다. 물론 그렇게 궁금한 것에 대해 묻는 것이 보다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한 번은 육군 공보 장교 한 분이 지도를 그려놓고 각 사단, 군단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전체적으로 가르쳐 주기도 했어요. 각 군의 공보 장교분들이 정말 든든했죠. 처음 긴장했던 것과 달리 실제로 물어보면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고요. 또 국방부 출입기자로 좀 시간이 지나고 보니 군 복무한 남자 기자라도 다 아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눈치를 좀 덜 보면서 질문을 하게 됐죠.”
국방부 출입 6개월 차,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던 때는 가장 숨가쁜 시간 중 하나였다.
“토요일에 사건이 터졌죠. 거의 몇 달간 국방부 기자실이 북적북적했고 매일매일 기사를 쏟아냈어요. 새벽 1시에 퇴근하고 새벽 6시에 출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정말 국방부 옆에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매일 기사를 작성하면서 국방 기사를 쓰는 것도 많이 배웠고, 기사를 써야 하니 취재원들도 많이 알게 됐어요. 군사 작전이나 무기체계와 같은 내용이 들어가야 하니 공부도 더 많이 하게 됐고요. 가장 많이 배우고 성장했던 시기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맡은 일에 열과 성을 다하다 보니 단순히 최초의 국방부 출입 여기자가 아니라, 국방부 출입기자 그 자체로 인정을 받아갔다. 한국형 전투기 도입사업 추진 시에는 단독 기사도 냈다. 남성의 시각에서는 익숙하니까 새롭지 않다고 여겨지는 지점이었기에 아무도 기사를 쓰지 않았지만 최현수 동문의 시각에서는 조금 달랐다. 사실 여성이라는 희소성 자체가 어쩌면 그만의 무기가 됐다.
“같은 사안이라도 조금 다르게 쓰면 여기저기서 보는 눈이 달라요. 그러니까 다르다는 측면에서 인정을 좀 해준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최초의 여기자라는 게 희소성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조금만 잘해도 무척 잘하는 것으로 인정을 해주는, 유리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웃음) 다른 기자들도 그동안 기자실에 남자들만 편하게 있다가 여자가 들어가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그런 불편함을 최소화하려고 저도 노력했고, 같이 잘 어울리려고 했어요.”
국방부 출입기자 2년을 보낸 후 그는 다시 국방대학교 안보과정이라는 새로운 배움과 경험에 도전했다. 대개 3급 이상의 군인들, 정부 및 공공기관의 국장급 이상, 차장급 이상의 기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이 교육 과정은 각 기수 180-190여 명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함께 군사적 사안들과 국제 정치 등에 관해 공부한다. 이곳에서 군과 민의 구성원들이 함께 국가적인 사안, 민간의 사안에 대해 토의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협의라는 것을 이뤄내는 과정을 경험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무척 좋았어요. 모두가 같은 의견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안보과정에서는 정부, 군, 민간의 각 사안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이니 여러 얘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는 집안에 누구든 한 명은 꼭 군대에 가는 만큼 국민들 생활에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군에 관해 비판해야 할 부분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때로는 국가 안보차원에서 국민들이 알아서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국내뿐 아니라 해외까지 미치는 영향이 있으니까요. 안보과정에서는 그런 부분들을 서로 논의할 수 있어서 우리 사회에서 합의라는 것을 도출해내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군인들의 인간적인 어려움이나 힘든 점들도 알게 됐고요. 이후에 군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기사를 쓴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아마 이때 여러 군인들과 함께 공부하며 교류하면서 이해가 깊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 동문은 국방대학교 안보과정을 마친 후 신문사로 복귀했다. 산업부, 경제부 등을 거친 후 그는 군사전문 기자로 지원했다. 전문기자는 출입처를 여러 곳 순환하는 기존의 제도와 달리 자신의 전문 분야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제도로 2009년 새롭게 도입됐다.
“복귀 후 산업부와 경제부 등을 거치다 보니 군사 쪽의 공백 기간이 3년 정도 됐어요. 그런데 국방부라는 곳이 취재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거든요. 다른 부서와 달리 취재원이 잘 만나주지도 않고요. 만난다 하더라도 오래 이어지기 쉽지 않아요. 전문 기자로 국방부를 출입한 어느 저녁, 저만 기자실에 있고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럼 너무 불안해지는 것이죠. 나만 빼고 다른 기자들은 누구를 만나며 취재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고요. 내일 아침에 신문을 펼쳤을 때 나는 못 쓰고 다른 사람은 다 쓴 기사가 있다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함이죠. 아침에 일어나서 현관문을 열 때 조마조마해요. 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님이 쓴 책 제목이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예요. 거기서도 매일 아침 기사 결정, 신문이 나가기 직전의 결단과 책임의 순간, 긴장을 얘기해요. 매일매일 평가를 받는 기자들의 삶의 일부분이죠.”
이는 기자들의 비애다. 특종을 열망하고 뒤쳐지지 않으려는 현장의 치열함을 늘 달고 사는 것이다. 아침마다 두려웠다고는 하지만, 최현수 동문은 그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 특종을 내곤 했다. 가장 크게 주목받았던 것은 바로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기사다. 최 동문은 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있기 전, 폭발력이 강한 화학성분인 RDX(Research Department Explosive)가 천안함의 연돌에서 발견됐으며, 한글이 새겨진 어뢰 추진체가 발견됐다는 특종을 냈다. 당시 천안함 연돌에서 화약성분이 발견됐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 성분이 RDX라는 것은 밝혀지지 않았었다.
“매일 특종 경쟁이 치열했어요. 어느 때보다 단독 기사를 많이 낼 수 있었는데 가장 주목받았던 것이 RDX라는 화약 부분과 한글이 쓰여진 어뢰 파편을 찾았다는 거였죠. 천안함 연돌이라는 부분에서 화약 성분이 발견됐죠. 화약에 관한 전화를 돌리다가 우연히 한 취재원하고 연결이 됐는데, RDX라는 화약이 나왔고 이것은 사회주의권에서 사용하는 화약이라는 정보를 얻게 됐죠. 또 천안함 민공단 합동조사단 발표를 이틀 남긴 시점에 한 방송국에서 어뢰 파편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나왔어요. 그 방송사에서는 특종이었고, 제게는 낙종이었지만 어떻게 됐는지, 어떤 어뢰 파편인지 확인은 해야 했죠. 그런데 아무리 취재를 해봐도 확인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다 공중전화로 온 전화를 받았고, 한글이 써있다는 제보를 받았죠. 한글이 적혀있다는 것은 북한이 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결정적 증거였어요.”
실제로 합동조사단의 발표 시 최현수 동문의 기사는 사실로 밝혀졌다. 그의 연속된 특종으로 기자들 사이에서 최현수라는 이름이 자주 올랐다. 특종을 계속하는 최현수 기자 때문에 골치 아프다며, 도대체 누구냐며 같은 회사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물었다는 말도 전해 들을 정도. 특종이 보도된 신문은 다음날 아침 구하기 힘들 정도로 귀했다. 이 특종으로 그는 1급 특종상을 받고 2011년 최은희 여기자상과 올해의 여기자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인정을 받기 전까지 사실 최 동문은 부침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2009년 국방 전문기자로서의 첫해, 숨가쁘게 뛰었고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일했지만 조직 내에서 그만큼 인정을 받지 못해 힘든 마음이 있었다. 인사고과에서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일한 만큼 인정받지 못해 아쉽고 너무 힘들었던 시기였기에 사표를 품고 다녔다. 절치부심하던 최 동문은 2011년 대내외에서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으며 그제서야 사표를 찢었다고.
최현수 동문이 특종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취재원과의 단단한 신뢰 관계다. 국방 분야의 취재원은 쉽게 구할 수가 없다. 워낙 예민하고 기밀한 정보가 많기 때문에 신뢰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그가 취재원 보호를 최우선에 두고, 신뢰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인간적인 배려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는지는 여러 일화에서 드러난다.
“국방 관련해서 쓰여진 책에 제 얘기가 두 번 등장을 하는데, 하나는 한철용 장군의 <진실은 하나-제2연평대전의 실체적 진실>이라는 책에서 ‘기자들의 직업 정신이 대단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국민일보 C 기자를 언급했어요. 천안함 피격 사건 시 민관군 합동조사단 군축단장을 맡았던 윤종성 장군의 회고록 <천안함 사건의 진실>에도 저와의 에피소드가 많아요. 이 분과 꽤 친분이 있었는데, 조사단 단장을 맡았으니 얼마나 많은 정보를 알고 계셨겠어요. 그런데 저는 단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어요. 친분이 있는 제가 기자로서 이것저것 물으면 얼마나 곤란하시겠어요. 훗날 사안이 마무리된 후에 책을 쓰면서 자신을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고, 고마운 말씀을 쓰셨더라고요.”
국방 기사는 때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의 파급력, 그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외교 안보적인 문제까지 품고 있다. 그래서 간혹 기사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생기기도 한다. 갈등의 순간이지만 그때도 최현수 동문은 국익이라는 기준을 지켜왔다. 기사를 지르는 대신, 타당한 이유가 있으면 기사를 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기자로서의 열정과 끈기, 취재원에 대한 신뢰는 최 동문이 오랜 기간, 포기하지 않고 주목받는 성과를 내며 국방 출입기자, 군사 전문기자로 일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사진. 2019 한미국방장관회담을 위해 방문한 패트릭 섀너핸 미국 국방부 장관 대행과 인사하는 최현수 동문)
최현수 동문이 국방부 출입을 한 지 10년 정도가 흐르는 동안 국방부 출입기자와 군사 전문기자를 혼자 다 감당하다 보니, 깊이 있는 기획 기사나 심층 인터뷰 등을 추진하고 싶지만 힘에 부쳤다. 다음을 생각했고, 그것은 ‘여성 최초의 국방부 대변인’이라는 뜻밖의 기회로 찾아왔다.
“조용히 시간을 가지면서 미래를 도모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국방부 대변인으로 가게 되었어요. 사실 그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 잘 알았기 때문에 처음에 고민은 좀 했죠. 바로 옆에서 대변인을 지켜보고 괴롭힌 당사자니까요 (웃음). 다른 일을 해도 대변인은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른 길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정년도 2년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어요. 새로운 경험을 해 볼 필요도 있었고 무엇보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것, 내가 쓰고 있는 기사가 과연 실제 국방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과 얼마나 일치될까, 제대로 잘 알고 쓴 게 맞을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실제로 국방 사안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요.”
서류, 면접, 역량 평가 등 여러 단계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마침내 최현수 동문이 국방부 대변인에 임명됐고 또 다시 이목이 집중됐다. 다시 한번 ‘첫’,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기대와 함께 놀라움, 우려의 반응이 공존했다.
“군대도 안 갔다 온 여자가 뭘 안다고 군을 대변하냐는 댓글도 있었어요. 어떤 분은 최현수 대변인은 기자 생활을 했고 10년 정도 전문성이 있어서 우리 남자들보다 훨씬 많이 안다, 이렇게 반박해 주시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런 우려들이 있었죠.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첫 브리핑은 무척 떨렸다. 첫 브리핑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그는 ‘국민의 눈높이에서 정직하게 정보를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대변인 시절도 사직서를 품고 다닐 만큼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차마 사직서를 꺼내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뒤에 또 다른 여성 대변인이 올 수 있는 기회를 열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걸음은 늘 뒤에 오는 사람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한사람의 잘못으로 뒤에 오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태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중간에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여성 대변인의 존재감, 여성이 대변인을 하더라도 일을 잘한다, 국방부를 대표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저로 인해 다시는 여성 대변인을 쓰면 안 된다는 인식이 가지면 안 되잖아요. 매사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년 7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마음 편히 지낸 날들은 손꼽을 정도예요. 언제 어떤 일로 급히 국방부에 들어가야할지 몰라 국방부 가까운 곳에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평일에는 그곳에서 지냈어요. 강릉 지역 산불이 발생했을 때는 새벽 2시에 나가기도 했죠. 종종 새벽에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는 북한 때문에 통상 출근 시간보다 1시간 정도 빠른 새벽 5시경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로 달려가기도 했어요. 비상사태 시 먼저 장관께 보고하고 주요 인사들에게 알린 뒤 대변인에게 연락이 오는데, 연락받고 급하게 서둘러도 국방부에서 10분 여 정도 떨어져 있어 장관님보다 늦게 도착해 머쓱해지는 경우도 꽤 있었어요.”
국방부 대변인으로서 그가 가장 힘들고 아쉬웠던 순간은 국민의 군대로서 국방부가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노력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다. 때론 국익, 안보를 위한 노력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프레임에 싸여 비난의 화살로 돌아온다.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거칠기로 유명한데, 날선 설전이 오가는 때도 있었다.
“한 번은 날씨 때문에 육해공군 대규모 해상 사격훈련을 하지 못했어요. 정말로 날씨 때문에 훈련이 취소된 것인데, 군이 북한의 반발을 의식해 눈치보며 훈련을 안 했다는 기사가 난 거예요. 그래서 정정보도를 청구했는데, 이와 관련해 브리핑룸에서 기자와 설전을 벌인 일이 있어요. 사실은 그 기자가 아끼고 친한 후배였는데 날선 신경전을 한 거죠. 그 장면이 영상으로 남아있는데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죠.”
국방부 대변인으로서,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느끼는 자부심, 사명감을 느끼는 순간들도 많았다. 최현수 동문이 회상했던 가장 보람있었던 순간은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비행으로 인한 갈등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다. 조난 당한 북한 선박을 구조하고 있는 우리나라 광개토왕함에 일본 초계기가 지나치게 저고도로 접근했던 사건으로 당시 일본은 오히려 광개토왕함이 초계기에 사격통제 레이더를 조사했다며, 한일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당시 광개토왕함은 조난된 북한 선박을 찾기 위한 레이더를 조사했을 뿐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자신들을 조준하려 했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자신들의 주장에 유리한 영상 일부분을 협의 없이 공개해 갈등이 격화됐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대변인으로서 그의 역할은 국내외에서 큰 화제가 됐다. 최 동문은 전투사와 같은 각오로 일본의 부당한 대응에 물러섬 없이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자료와 확고한 입장으로 대응했다.
“원래 우리는 레이더를 안 쏜 것이 분명하니까 영상은 객관적인 팩트가 확인된 후에 노출시키거나 하고 지금은 노출하지 않기로 했는데, 협의 없이 영상을 틀어버렸죠. 그런데 레이더를 쏘면 로그 기록이 다 나와요. 그래서 우리 쪽 로그 기록을 제시하면서, 그쪽의 로그 기록도 내놓으라고 했지만 안 보여줬어요. 영상을 객관적인 증거로 보기 어려웠죠. 또 만약 이 사안이 끝나고 일본 측 영상만 남아 있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진짜 일본에게 그런 일을 했다고 여길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반박 영상을 만들었어요. 우리가 안 했다는 것, 위협적으로 일본이 저공비행을 했다는 내용과 규탄하는 대변인 멘트 등이 들어가고 일본이 왜 잘못했는지 설명하는 영상을 유엔 공식 8개 언어로 만들어 배포했죠. 조회수가 계속 오르고 우리나라 편을 드는 댓글들도 늘어갔어요. 보람을 많이 느꼈죠. 일본 방송에서도 많이 나와서, 한 후배가 캡처해서 보내며 당분간 일본에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일본 공세가 높아지고 결국 관방장관 선에서 아베 총리까지 발표 수위가 올라가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초지일관 우리가 안 한 게 분명하니까 대변인 선에서만 대응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반박 성명은 그 선에서만 끝냈죠. 나중에 외신 기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성 대변인이 차분하고 날카롭게, 진중하게 반박하는 모습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더라고요.”
전투력 강한 국방부 대변인으로서 그의 모습은 미국 측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안이 해결되고 한미 국방장관 회담 시, 배석자 소개 시간에 미국 국방장관에게 그 유명한 여성 대변인이냐는 멘트를 들었을 정도다. 최현수 동문은 국익 앞에서는 전투적이지만 함께하는 동료, 상사로서는 따뜻하고 섬세했다. 바쁜 와중에도 함께 일하는 병사들을 가족의 마음으로 챙겼고 병사들 역시 그 마음을 알아주었다. 밤 10시 퇴근이 일상이었던 그는 그 시간에도 청사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안쓰러워 대변인실 간식을 들고 나와 챙겨주곤 했다.
“어느 날 병사 몇 명이 대변인실로 찾아왔어요. 청사출입을 담당하는 병사들이 직접 대변인실로 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어요. 전역한다며 감사하다고 거수경례하고 편지를 전하는 병사는 있었지만, 이렇게 여러 명이 한꺼번에 오는 경우는 드물었거든요. ‘아 누가 사고를 쳤나’ 싶었는데, 머뭇거리더니 탁자 위에 초콜릿을 한가득 올려놓더라고요.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라 대변인님께 드리려고 저희가 초콜릿을 만들었어요.’라면서 빼곡하게 감사 인사를 적은 긴 주황색 두루말이 도화지도 건네주더군요.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늦게 퇴근하시는 날마다 간식 챙겨주셔서 너무 고마왔다. 격려해주시는 말씀에 힘을 얻었다. 전역 후에도 잊지 않고 성실하게 남을 배려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등의 예기치 않은 말들을 해줘서 마음이 찡했어요.”
지난해 두 번째 여성 민간인 국방부 대변인이 임명되면서 그간의 부담감을 이제 조금 덜었다. 첫 여성 대변인이 잘 못하지는 않았다는 반증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다.
최현수 동문은 국방부 대변인을 마치고 국방연구원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일하다 국방정신전력원 원장을 부임했다. 국방정신전력원은 군에서 공보장교(정훈장교)들을 교육시키는 교육기관이다. 군의 유형 전력과 무형전력 중,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신전력을 담당하는 장교들을 교육시키는 곳으로, 이전에는 대개 육군 장군들이 수장으로 갔지만 최현수 동문이 부임하면서 첫 여성 민간인 출신 국방정신전력원장이 탄생했다. 부대장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군번도 받고 군 경력도 생겼다. 그는 교육 콘텐츠적인 측면뿐 아니라 교육 환경 개선에도 힘쓰며 작지만 큰 변화들을 불러왔다.
“소위부터 대위까지 입소한 장교들에게 군인 정신, 국가 안보관 등의 교육을 해요. 병사들의 정신전력에 쓰이는 교재, 각종 책자, 동영상 등 많은 콘텐츠를 만들고 있고요. 기업으로 치면 인재개발원 같은 곳이죠. 정훈장교 외에도 접경지대 장교나 공무원들도 안보관 교육을 합니다. 또 홍보 활동에 대한 교육도 하고요. 처음 갔더니 정신전력이 매우 중요하다는데 공간이 좀 안 좋았어요. 생활 공간이 의식을 많이 지배하기 때문에 잘 갖춰져 있으면 대접받는 느낌이 나잖아요.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고요. 여기저기서 자투리 예산을 확보해 공간을 좀 더 쾌적하게 환경 개선을 했습니다. 국방정신전력원이 해군대학 건물을 쓰고 있는데, 독립건물을 건립하는 것을 국방부와 협의하고 예산확보까지 마무리하고 퇴직했죠.”
(사진. 국방정신전력원장 이임식)
현재 최 동문은 국방 관련 세미나 강연이나 기고 등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그가 치열하게 성장해 온 경험, 가까이에서 젊은 군인들을 지켜보며 느꼈던 점들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의 성장을 위한 코칭 활동을 하고 있다. 코칭 자격증도 땄다. 코칭을 하면서 최 동문은 개개인의 성장이 가지는 무한한 가능성에 집중한다. 개인이 자신을 계속 계발할 수 있는 환경과 능력을 갖추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자산이 된다는 것을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군대의 대를 무리 대(隊) 자를 쓰지 않고 대학 대(大)자를 쓴 적이 있어요. ‘군대(軍隊)는 군대(軍大)’다. 군에서도 대학에서 배우듯 많은 깨달음을 얻거나 변화될 수 있다는 거죠. 전략적인 전력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배움들이 있어요. 예전처럼 대가족이 아닌 오늘날, 군이라는 곳은 어쩌면 젊은이들이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공공 조직이잖아요. 이곳에서 좋은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 사회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요. 점점 줄어드는 병력 자원을 얼마나 훌륭하게 성장시킬 수 있는가가 우리 군에서도 가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고용노동부도 함께 협력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보통 군에 입대하면 경력이 단절되는데, 이들의 커리어 개발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또 우수 인재의 경우는 군에 남을 수 있도록 어떻게 군을 좀 더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고민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최현수 동문의 삶을 보면 매 순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배우며 열정을 다해 하나의 점을 무한한 가능성을 펼치는 큰 원으로 확장시켜 나갔다. 낯선 환경에 던져졌고, 많은 편견들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새로운 길을 냈다. 최초라서가 아니라 최고의 열정으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모습에 큰 자양분이 된 곳이 다름 아닌 연세다. 최 동문은 후배들도 연세 캠퍼스에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배워나가며 스스로, 또 함께 성장해 나가길 소망한다.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이 큰 어느 선배가 ‘국적은 바꿀 수 있으나 학적은 바꾸지 못한다’고 말씀하셔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연세라는 공간에서 소중한 인연과 함께 숨쉬고 탐구하고 고민하고 울고 웃었던 경험은 제 삶의 소중한 자양분이었어요. 연세가 지닌 건강한 개인주의와 과도하지 않은 공동체의 연대, 마땅히 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주는 동문들이 많아요. 요즘 여자총동문회 선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또는 모임에서 만날 때마다 정말 많이 배웁니다. 후배들도 부지런히 만나고, 이야기 나누길 권하고 싶어요.”
더불어 언제나 꿈을 향한 여정은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포기보다는 열정을 품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잠시 돌아가더라도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현재의 상황이 어렵다고 꿈을 접지는 말았으면 해요. 저 역시 가정형편 상 대학원 진학이나 유학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잊어버리고 살았지만, 신문사 입사 후 7년 만에 유학을 갈 수 있었잖아요. 30대 중반의 나이에 국제부 기자를 하며 조금 들여다 본 지식 정도였고 영어도 미숙한 채로 고군분투한 유학 시절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록펠러 채플에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힘을 얻었어요. 하루는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데 불현듯 ‘아, 그렇지! 내가 10여 년 전에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지! 하나님은 내 마음의 소원을 알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저 감사했어요. 상황이 어렵다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고 쉽게 포기하지는 말라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
치열하게 뛰었던 기자로서의 삶, 살얼음판 같은 국익이라는 무게가 어깨에 있었던 국방부 대변인을 비롯한 공적인 임무자로서의 삶, 그리고 누군가의 삶에 변화와 방향을 잡아주는 코치로서의 삶 모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모두가 주목했던 ‘여성 최초’가 아니라, ‘최선의 성장’이 아닐까. 최초라는 타이틀이 명명되기까지, 그 뒤에는 최 동문의 쉼 없는 열정이 있었다. 최선을 다했기에 아무도 걷지 않은 그만의 새로운 길을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