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파 와인의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담다
- 2025.07.21
와인에 늘 따라붙는 말이 ‘전통’이다. 얼마나 엄격하게 전통적인 제조 방식을 지키고 있는가, 몇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등 좋은 와인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그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의 전통을 먼저 살핀다. 와인 레이블의 근엄함도 한몫한다. 그러나 차츰 전통의 품질은 지키면서 기존의 룰만을 고수하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도 이어지고 있다. 나파밸리에서 최초의 한국인 여성 와인메이커로 활약하고 있는 박수연 동문은 이 흐름의 한가운데 서있다. 와인에 대한 아무런 배경 없이, 우연히 마신 와인 한 잔에 매료돼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새로운 세상에 도전한 박 동문. 그가 만드는 와인은 섬세하고 독특한 개성이 담긴 고급스러운 맛과 향으로 기존 와인의 틀을 깨며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저는 모범적인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다들 경쟁을 하고 어려운 관문을 뚫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여지도 없었고, 다른 세상이 잘 보이지도 않았어요. 내가 무엇을 더 잘하는지 모르고 정해진 규칙에 맞춰 살아왔지요.”
현재 미국 나파밸리에서 한국 여성 최초의 와인메이커로,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와인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장인이지만, 박수연 동문이 와인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한국인으로 으레 겪는 과정을 충실하게 밟아왔다. 처음부터 와인메이커라는, 구체적이고 특별한 꿈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진로에 대해 한 가지는 확실하게 방향을 잡았다. 어느 분야에서건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우리 대학교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꼭 전문가가 되고 싶었어요. 당시만 해도 여자들이 하는 전문적인 일이라는 것이 무척 제한적이었어요. 교사, 의사, 약사 등. 게다가 되기도 힘들고요. 어머니께서도 어렸을 때부터 전문가가 되면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죠. 다양한 진로를 탐색하다 좀 더 유동성 있게 전문적인 업을 할 수 있는 분야가 공학 분야라고 판단했어요. 또 공학 분야 중에서도 여성으로서 더 유리할 수 있는 분야가 식품생명공학 분야가 아닌가 싶었고요.”
성실한 그답게 대학 생활도 충실하게 이어갔다. 빡빡한 입시를 거쳐 대학에 입학하면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며 공부에 소홀하기 마련이지만 박수연 동문은 누구보다 학과 과정에 충실했다. 대외 활동도 학과 중심의 활동에 힘을 쏟았고, 특히 방학 동안 농촌에 가서 농사도 돕고 아이들도 돌봤던 농촌 봉사활동이 가장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고 회상한다.
충실하게 대학 생활을 보낸 박수연 동문은 졸업 후 전공을 살려 국내 식품회사에 입사했다. 박 동문은 연구원으로 전문성을 발휘하기를 기대했다. 전통 있고 탄탄한 회사였지만 당시 사내에 여성 프로덕트 매니저(Product Manager, PM)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꽤 보수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입사 후, 한 명의 여성도 없던 그 PM 자리에 박 동문이 배치됐다. 연구원을 간절히 희망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것이었다.
“무조건 연구소로 보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여성 1호 프로덕트 매니저가 됐죠. 일종의 1호 실험 대상이라고 할까요? (웃음) 연구소 배경 지식이 있고 여성으로서 소비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PM으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엔 인사과에 직접 찾아가 마케팅은 잘 모르는 분야니까 연구소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당장은 어렵고 나중에 보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3년의 시간을 마케팅 부서에서 보냈어요.”
그렇게 3년을 지내고 보니 마케팅에 대한 전문성을 더 키워야만 이 분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에 집중하든지 최선의 노력을 하는 박수연 동문다운 갈망이었다. 그렇게 결정한 것이 해외 MBA과정을 이수하는 것. 이를 준비하기 위해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큰 결심을 하고 간 미국에서 박 동문은 그의 미래를 바꿀 ‘와인’을 운명처럼 만났다.
“호텔에서 일하면서 MBA를 준비했어요. 그때가 스물여섯 살. 그 호텔에서 생애 처음으로 와인을 마시게 된 거죠. 그 전까지 제게 술이란 맥주는 배부르고, 소주는 알코올 냄새가 나고, 부담스러운 것이었어요. 그런데 와인은 향도 너무 좋고 맛도 좋아 계속 마시게 되는 거예요. 게다가 발효로 만든 술이라니. 발효라고 하면 그냥 김치, 된장과 같이 향도 세고 부담스럽다고 여겼는데 향도 맛도 좋은 술을 발효로 만든다니 믿겨지지 않아서 더욱 흥미로웠어요. 그냥 세상에 이런 맛있는 술이 있구나, 하며 반해버렸죠.”
자꾸만 궁금해지고 흥미진진한 와인의 세계를 접할수록 와인에 대해 공부하고 깊이 파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쌓아온 경력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분야,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기엔 망설임도 컸다. 안정적인 길을 걸어온 삶을 뒤흔드는 너무도 큰 변화였다. 오랜 고민 끝에 박 동문은 와인과의 만남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와인에는 흥미로운 뭔가가 자꾸 있을 것 같고, 알면 알수록 설렌다고 할까요. 어쩌면 어렸을 때 꿈꿨던 ‘전문가로서의 삶’은 와인과 관련한 일을 하는 것이 더 부합하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죠. 그렇게 MBA 과정을 포기하고 와인을 선택했어요.”
큰 결심이었지만 타이밍과 환경은 딱 좋았다. 와인이 박 동문에게 운명처럼 흔쾌하게 길을 내어주듯이 학부에서 전공한 생명공학은 와인과 맥이 닿아 있는 공부였고, 그가 와인을 선택한 시점에 한국에서도 와인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박수연 동문은 계속 열심히 하고 있으면 어딘가에 길이 보일 것이라며, 10년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그때 다시 판단하리라, 다짐하며 용기를 냈다.
와인과 관련된 많은 직종들이 있지만 박수연 동문은 와인의 홍보나, 와인을 마시고 맛과 향을 평가해 음식을 페어링하는 ‘소믈리에’ 같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직종보다는, 그 와인을 선보이기까지 제조를 책임지는 일을 하고 싶었다. 현재 그가 포도의 품종 선택, 재배, 수확, 블렌딩, 발효 등 와인을 만드는 과정을 총괄하며 와인의 품질을 책임지는 ‘와인메이커’로서 활약하며 열정을 다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와인이 어떻게 발효되는지, 다양한 품종의 포도나 특정 방식의 발효, 숙성에 따라 맛과 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 와인이 제조되는 과정이 너무 궁금했어요. 아마 제가 생명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 같아요. 나만의 방식으로 만든 와인은 어떨지 훨씬 더 관심이 있었죠.”
처음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분야에서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일단, 무엇이라도 와인 업계에 발을 들이고자 했다. 그만큼 꼭 도전해 보고 싶고 두근거리게 하는 일이었다. 첫걸음으로 용기를 내 나파밸리의 한 와인 회사 부설연구소에 인턴으로 지원했다. 그의 바람대로 실험실 엔지니어로 트레이닝을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와인에 대해 공부를 하고, 2007년에는 와인컨설팅 회사 ‘와인포니아’를 설립해 나파밸리의 와이너리들에서 생산되는 좋은 와인을 블렌딩해 만들고 특정 브랜드나 개인에게 맞춤형 와인을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다. 미국 프로골프 PGA, LPGA 토너먼트를 위한 와인을 만들거나, 아기 탄생, 웨딩 등 누군가의 특별한 날을 위한 와인을 만들기도 했다. 단지 연구실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나파밸리의 좋은 와인들을 경험하고 그것에 자신만의 방식과 상상력, 스킬을 더해 다양한 고객을 위한 와인을 만들며 실제 수요와 니즈에 대한 경험을 탄탄하게 쌓았다.
“와인메이커들이 자신만의 와이너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여러 와이너리의 와인을 블렌딩하며 와인을 만들어 볼 수 있어요. 꼭 제가 포도를 재배해서 만든 와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만든 와인으로 블렌딩해서 최종 와인을 만들 수 있죠. 그걸 알게 되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LPGA, PGA 토너먼트 와인이 제가 처음 블렌딩해 만들었던 와인이에요. 회사의 직원으로 와인을 만들 때와 제 이름을 건 와인을 만들 때는 정말 감각이 달라지더라고요. 와인을 블렌딩할 때 아주 작은 한 방울이 들어가느냐 아니냐에 따라 맛의 차이가 확 느껴져요. 이를 통해 창조한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예술가들의 터치 하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또한 그는 최고의 와인 관련 학교로 인정받는 UC 데이비스(UC Davis)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학을 공부하고 최우수로 졸업했다. 보다 전문적이고 총체적인 지식, 깊이를 더하기 위함이었다. 박수연 동문은 이 과정에서 연세에서의 배움이 디딤돌이 됐고, 이국에서도 큰 자부심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와인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학교 다닐 때 배웠던 화학 용어, 기본적인 미생물 발효 용어 등을 다 알고 있었기에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사실 전문가들끼리는 그 분야에서 쓰는 전문 용어 하나만으로도 대화가 되잖아요. 제가 UC 데이비스에 간 것도 와인 생산과 관련한 전문 용어들을 이해하고 제 자신의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였어요.”
더불어 박 동문은 그가 새로움을 찾고 배우고 도전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학창 시절, 연세인으로서 교육받은 도전정신에 힘입은 것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가 만나는 많은 연세 동문들은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나파와 가까운 실리콘밸리를 비롯해서 미국에 와서 활약하고 계신 동문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분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무척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굉장히 세련되게 만들어가죠. 저 역시 그런 멋있는 모습을 보면서 멈추지 않게 되는 것 같고요.”
박수연 동문은 나파밸리와 소노마밸리에 있는 80여 개 포도밭을 관리하면서 컨설팅하고 있고 2014년, 와인브랜드 ‘이노바투스(innovatus)’를 론칭해 그만의 와인을 생산하게 됐다. ‘이노바투스’는 라틴어로 혁신을 의미한다. 와인의 전통 종주국인 유럽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 새로운 땅에서 만든 와인이 탄생하는 나파밸리, 나파밸리 최초의 한국인 여성 와인메이커 박수연 동문, 그리고 그가 선보이는 혁신적인 맛과 향의 와인. 이노바투스는 나파밸리의 기업가 정신을 기리는 한편 박 동문이 만들어 내는 와인의 정체성을 모두 담은 이름이다.
특히 그가 생산하는 와인들은 누구도 시도하기 어려웠던 제조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이에 담긴 이야기도 특별하다. 이노바투스의 대표 와인은 이노바투스 비오니에(Viognier)와 쿠베(cuvee)다. 2020년 탄생한 비오니에가 특별한 것은 나파밸리에서는 희귀한 품종인 데다 박수연 동문이 가장 좋아했던 품종, 비오니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UC 데이비스에 다닐 때 비오니에 품종을 너무 좋아했어요. 학과 과정 중 여러 품종의 포도를 실제 보고 따먹어 보고 무엇인지 다 맞춰보는 과정이 있었어요. 심지어 포도 농장에 가서 다 비슷하게 생긴 포도나무들 수백 그루의 품종을 맞춰보기도 하는데 저는 비오니에는 보자마자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아했어요. 그런데 나파밸리에서는 흔한 품종이 아니거든요. 그 품종을 구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와인을 만들게 된 거라 특별한 애정이 있어요.”
피노누아와 시라 품종을 블렌딩한 쿠베도 인상적이다. 이 블렌딩은 어느 곳에서도 쉽사리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 동문은 많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도전했다.
“처음에는 피노누아 와인을 만들려고 했어요. 원래 피노누아는 여리여리하고 섬세한 품종인데, 포도 농사를 하고 보니 품종을 가져온 지역이 좀 더워서 그런지 진한 피노누아였어요. 제가 원하고 이해했던 피노누아가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을 했어요. 일반적으로 피노누아는 유니크함이 있기 때문에 블렌딩에 잘 쓰지 않거든요. 저는 오히려 과감하게 블렌딩해 써봐야겠다 싶었어요. 그것도 극과 극인 시라 품종과 함께 섞었죠. 의외로 굉장히 조화로웠고 향도 독특했어요. 맛있으면서 너무 무겁지도 않고요. 오히려 위기가 기회가 된 셈이죠.”
물론 잊지 못할 시행착오도 있었다. 처음에 과감하게 블렌딩했지만 첫 테이스팅에서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맛이 느껴져 펑펑 울기도 했다. 오랫동안 고생해서 만든 결과물이 엉뚱한 치기였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니 눈에 띄게 맛있어져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한 사연이 담긴 2014년 빈티지는 300병 정도를 보관 중이다. 의미가 깊은 만큼, 좋은 날이 있을 때마다 꺼내 마시는 아끼는 와인이 됐다.
이노바투스는 스파클링 와인부터 화이트, 로제, 레드 와인까지 다양한 라인업의 와인을 만들고 있다. 특히 비오니에 품종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은 포브스, 제임스 서클링 등 권위 있는 매체에 소개됐고, ‘나파의 기품을 담으면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나파의 특별한 와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와 함께 이노바투스는 미국 시장을 넘어 한국, 중국 등 세계 시장 진출의 폭도 넓히며 전 세계에 독특한 매력의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렇게 박수연 동문은 ‘혁신’이라는 브랜드 정체성에 맞게 엄격한 룰을 고수하는 와인메이커의 세계에서 생각의 전환을 이끌며 다양성을 더하고 있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와인을 잘 알았다면 오히려 함부로 도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파밸리는 유럽의 이민자들이 와서 포도밭의 지형을 보고 내 고향, 우리 할아버지가 있던 그 땅의 포도밭을 떠올리며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가 시작됐어요. 그것이 나파밸리의 정신이거든요. 미국이 와인을 전통적으로 생산하던 나라는 아니었으니까요. 현재는 나파밸리가 종주국 유럽 못지 않은 높은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대표 생산지로 거듭났죠. 저 역시 전통적으로 와인과 밀접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전혀 몰랐기 대문에 품종을 해석하는 방법, 블렌딩하는 방법 등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거죠.”
이노바투스의 와인 레이블에도 그가 지향하는 혁신의 상징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서양의 상상 속 사자와 같은 ‘그리핀(Griffin)’이 그려져 있다. 사자의 몸통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 앞발을 가진 전설의 동물이다. 생각의 전환으로 틀을 깬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리핀의 뒷 배경에는 전통을 상징하는 오래된 책이 펼쳐져 있다. 즉, 전통의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이노바투스의 의미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나파밸리 사진: 이노바투스 제공)
와인 공장에서의 제조, 포도밭 관리, 맞춤형 와인 블렌딩에 이어 이제 자신만의 와인을 만드는 일까지 와인 제조와 관련한 전 과정을 두루 경험하면서 박 동문은 변함없이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한 기본을 챙기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내는 일을 즐긴다. 1년 동안 포도 품종을 키우고 관리하고 수확해 발효, 블렌딩하는 등 일련의 제조 과정 자체가 여전히 그에겐 가장 매력적인 일이다. 대부분의 과정을 경험했던 것은 그에게 가장 값진 자산이다.
“저도 UC 데이비스에서 공부하기 전까지는 포도 재배와 관련한 일은 전혀 몰랐어요. 그전에는 7-8년 동안 그냥 와인 제조 공장에서 일을 한 거죠. 졸업 후에 비로소 공장이 아닌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된 거예요. 농장 일을 하다 보니 포도를 이해한다는 게 무척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죠. 또 농장의 포도밭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고, 공장에는 향이 있어요. 그 모든 과정이 다 매력적이에요.”
와인을 만드는 데 있어 자신만의 ‘해석’을 중심에 두는 박수연 동문, 그래서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와인이 블렌딩되고 선보여진다.
“포도나무에서 해석을 시작해요.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만들었던 전통적인 주정 방식을 받아 답습을 하다 보니 그 스타일이 전형적으로 고정되잖아요. 그 제조 프로세스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런 배경이 없으니 저만의 해석 방식이 좀 다르고 특이해요. 그래서 저는 와인의 결과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와인의 원재료, 포도를 먼저 보고 그 포도에서 제가 상상하는 맛을 내려고 해요. 그런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비오니에가 좀 특별하고 또 맛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국 그는 와인 속에 담긴 포도와 발효의 자연 원리, 식탁을 풍성하게 향기와 맛을 통해 와인이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와인을 구입해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우리나라에서 와인이 제조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종주국이 유럽이라지만 우리만의, 품질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박수연 동문은 최근 이런 점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와인 산지를 돌아보기도 하고 관련 학과가 개설된 대학교 초청으로 강연이나 자문을 하는 등, 한국의 와인 산업 육성에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제 시작이지만 가능성도 엿봤다.
“얼마 전 유원대학교 와인사이언스학과의 초대를 받아 다녀왔는데 깜짝 놀랐어요. 특히 와인 제조 설비 시설이 잘 되어 있고, 학교나 학생들의 의지도 컸어요. 그러나 가장 큰 한계는 키울 만한 품종이 없다는 것이죠. 과일용 포도와 와인용 포도는 전혀 달라요. 와인을 만들 수 있는 포도 품종은 무척 제한적이기도 하죠. 한국에서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과일용 포도로 와인을 만들고 있더라고요. 품종을 들여오는 것뿐만 아니라 그 품종을 한국 땅에 맞게 다루는 방식도 개발이 필요해요. 와인 품종 확보의 어려움, 그리고 와인 메이킹 노하우가 아직은 좀 부족해도 잘 구축된 인프라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가능성을 봤어요. 이를 돕기 위해 앞으로 제가 할 일이 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그 역시 언젠가 한국에서 와인을 생산하고 싶다. 또 이에 앞서 한국의 유기농 농법을 나파밸리에 적극적으로 적용해 보고 싶다. 우리나라 유기 농법에서 발효된 비료가 제초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영양분을 주는 것처럼, 보다 효과적이고 친환경적인 농법이 미국의 와인용 포도 재배에도 잘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실제로 그는 보유하고 있는 실험용 포도밭에 적용해 보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는 나파밸리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싶은 그의 바람과도 연계된다. 아시아인으로서 와인메이커의 길을 개척해온 그이기에, 그녀 스스로 자연스레 가지게 되는 책임이기도 하다.
“이미 와인의 전통, 노하우가 있는 유럽 등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크지 않아요. 오히려 아시아의 농업 방식과 같은 것을 미국에 적용하고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와인 생산을 위해 모자란 부분은 제가 한국에 노하우를 공유할 수도 있고요. 한국의 유기농 농법을 제가 나파밸리에서 성공한다면 그것이 또 다른 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박수연 동문은 처음 와인을 맛보았을 때의 행복을 사람들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와인을 마신다는 일이 너무 어렵거나 무겁지 않았으면 한다.
“제가 좀 아쉬운 점은 사람들이 와인에 대해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냥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더 쉽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와인을 음식에 비유하면 제가 요리사이잖아요. 그리고 요리사에 따라 맛이나 스타일이 달라지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사실 좋은 음식은 똑같아요. 그냥 맛있어요. 와인도 똑같아요. 분명히 내가 덜 좋아하고 더 좋아하는 취향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맛있는 건 맛있어요. 특히 음식의 맛은 ‘조화’에 달려있거든요. 조화로운 맛의 와인은 누구나 좋아하죠. 그래서 저 역시 ‘조화를 이루는 와인’을 계속 만들고 싶어요. 그저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마시면 조화롭다, 기분이 좋다, 맛있다, 그거로 충분해요.”
동시에 그는 와인을 일상에서 쉽게 즐길 수 있도록, 그저 와인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감성의 일부로 접근하는 환경을 만드는 데 역할을 하고 싶다.
“와인을 쉽게 ‘경험’하게 할 수 있어야 해요. 와인이 비싸면 맛있더라도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죠. 한국의 와인 문화 산업 자체를 발전시켜서 와인을 보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즐길 수 있게 하고, 문화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한국 와인 산지와의 연결을 통한 아카데미를 마련하는 등 재미있는 문화 이벤트도 필요할 것 같아요. 저 역시 와인을 쉽게 경험할 수 있도록 교육이든, 문화적인 일이든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고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박수연 동문에게는 ‘박수연’으로서의 삶과 와인메이커 ‘세실박(Cecil Park)’으로서의 삶이 있다. 박수연으로 매 순간 주어지는 어젠다에 충실했던 모범생으로서의 삶, 그리고 새로운 도전에 주저하지 않고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 왔던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세실박으로서의 삶. 그 둘 모두 그의 모습이다. 박 동문의 인생에 그 둘은 조화롭게 공존하며 일과 삶을 생기 있고 풍성한 향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 ‘와인 장인’, ’와인 전문가’ 박수연 동문이 세상에 선보일 다음 와인은 어떤 맛과 향을 품고 있을지,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