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도로 파손, 다른 책임 판단'... 공공서비스 실패 뒤 비난의 방향은
- 2025.12.18
길을 지날 때마다 위험하게 패인 도로를 마주하면 우리는 흔히 '정치인들은 도대체 뭐 하고 있나'라고 생각하곤 한다. 눈 앞의 공공서비스 실패를 마주한 시민들의 반응은 대개 ‘누구의 책임인가’를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도 책임의 화살이 반드시 같은 곳을 향하지 않는다. 같은 공공서비스 실패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정치인을 비난하기도 하고, 관료조직이나 민간위탁 업체를 비난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은 공공서비스 운영의 주체를 바꿈으로써 비난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리고 시민들은 그 전략에 어떻게 반응할까.
행정학과 문명재 교수는 영국, 홍콩, 중국 연구자들과 함께 이러한 질문에 정밀하게 설계한 국제 비교 실험 연구로 답한다. 연구팀은 공공서비스 실패 상황에서 정치인이 책임을 ‘떠넘기는’ 제도적 전략이 실제로 정치인에 대한 시민들의 비난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리고 그 효과가 서로 다른 제도·문화 맥락 속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았다. 여기서 제도적 장치란 관료조직에 집행 권한을 넘기는 내부 위임(internal delegation)과 민간기업에 서비스를 맡기는 민간 위탁(contracting out)을 가리킨다. 특히 이번 연구는 기존 연구가 주로 영국 등 서구 지방정부 맥락에 머물러 있다는 한계를 넘어, 동아시아 안에서도 서로 다른 정치·제도적 환경에 놓인 한국과 홍콩을 함께 분석함으로써 비난 전가 이론의 확장성과 경계 조건을 검증했다.
연구팀은 10년 전 영국에서 수행된 실험 연구(James et al., 2016)를 동일한 설계로 영국에서 다시 실행했고, 동시에 홍콩과 한국에 같은 실험을 도입해 시간과 국가를 동시에 가로지르는 확장적 비교 연구를 진행했다. 3개국 3,6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온라인 설문에서 실험 참여자들은 심하게 파손된 도로 사진(연구에서 제공된 비네트)을 본 뒤 그 도로를 누가 관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무작위로 받았다. 한 그룹에는 관리 주체에 대한 정보가 제시되지 않았고, 다른 경우에는 '지방 정치인이 도로를 직접 관리한다', '지방정부의 한 부서가 관리한다', '민간기업에 계약을 맺어 맡겼다'는 식의 정보가 제공됐다. 이후 응답자들은 '이 상황에서 지방 정치인들이 어느 정도 비난받아야 하는지'를 평가하고, 누가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지도 함께 묻는다.
연구 결과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비교’와 ‘국가 간 비교’라는 두 축에서 정치인들의 비난 전가에 주목할 만한 결과를 보였다. 세 국가의 사례에서 모두 공공서비스의 내부 위임과 민간 위탁이 정치인들에 대한 비난 정도를 유의하게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영국의 사례에서는 내부 위임에 따른 효과 뿐만 아니라, 이전 연구에서 방향만 제시됐던 민간 위탁의 비난 전가 효과가 통계적으로 명확하게 확인됐다.
반면 한국과 홍콩에서는 전반적으로 비난 전가 효과가 영국보다는 약하게 나타났고, 한국에서는 내부 위임이 시민들에게 책임 주체의 이동으로 인식되지 않는 특징이 발견됐다. 연구팀은 이를 정치와 행정, 중앙과 지방의 경계가 비교적 분명한 영국과 달리, 동아시아 맥락에서는 지방 정치인과 공무원을 하나의 공공권력으로 묶어 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위계질서에 대한 수용 수준이 높고 인간관계와 갈등 회피를 우선하는 집단주의적 사회문화를 갖고 있는 점이 국가 간 차이를 만드는 요인으로 해석했다. 그럼에도 세 나라에서 모두에서 민간 위탁은 정치인 비난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해, 민간 위탁이 책임의 초점을 정치인에서 시장 행위자로 옮길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는 동시에 책임성 측면의 문제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번 국제 비교 실험은 공공서비스 시행 주체를 조정하는 정치인의 제도적 전략을 두고도 시민들이 ‘누가 공공서비스 실패에 책임이 있는지’를 다르게 인식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동시에 정치인과 행정조직 및 공공과 민간의 경계에 얼마나 뚜렷한지, 권위 수용·집단주의같은 문화적 요소가 얼마나 강하게 작동하는지가 비난 전가 전략을 정교하게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인임을 시사했다. 이어지는 심층 인터뷰에서 한국의 공공서비스와 민간위탁, 그리고 책임정치의 미래에 대한 문 교수의 생각을 더 깊이 들어보았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비네트(vignette, 짧은 가상의 시나리오로 이 연구에서는 파손된 도로의 사진이 사용됨)의 현실성과 표준화를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각 국가의 참여자들이 동일한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모든 국가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세팅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동시에, 표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피응답자가 '이건 우리나라 상황 같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큼의 현실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로 보수 상태를 평가하는 비네트를 제작할 때, 한국의 도로 구조나 표지판과 같이 국가별 특성을 반영하되, 정작 핵심 변수인 도로 유지(maintenance)의 질은 모든 나라에서 동일하게 볼 수 있도록 조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동일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자료를 만드는 과정이 이번 연구에서 가장 많이 신경 쓴 부분입니다.
이번 연구는 한국 시민들이 공공서비스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는지에 대해 중요한 패턴을 보여줍니다. 먼저, 민간 위탁(contracting out) 상황에서는 시민들이 정부나 공공부문보다는 민간 기업을 더 책임 주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민간 위탁이 때때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위탁 이후 비용 증가나 서비스 질 저하가 발생할 가능성을 고려하면, 중요한 것은 위탁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관리(contracting-out management)입니다. 서비스 질과 비용 절감 효과를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민간 기업의 수행을 감시하는 장치가 필수적입니다.
반면, 공공부문 내부 위임(internal delegation)에서는 전혀 다른 패턴이 관찰됩니다. 행정적 실수나 서비스 실패가 관료 단계에서 발생하더라도, 시민들은 정치인을 탓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른바 위임효과의 부재(absence of delegation effects)로, 한국에서는 정치와 행정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비난 전가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 현상은 한편으로는 책임의 정확성을 떨어뜨리는 문제가 있지만, 동시에 시민들이 공공부문 전체에 높은 책임성을 요구하는 긍정적 측면도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시민들의 이러한 인식이 완전히 비합리적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공공서비스의 최종 책임을 정치인에게 묻는 문화는 행정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으며, 다만 책임의 범위와 한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논의가 뒤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연구는 크게 세 가지 학문적 의의를 갖습니다. 먼저, 본 연구는 실험 연구가 한국 사회과학에서도 폭넓게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 방법론이 활발히 적용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번 연구는 실험적 접근이 한국 맥락에서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공할 수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실험 연구 방식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둘째, 연구 과정에서 국가 간 비교연구의 필요성이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각 국가의 정치·행정 환경과 시민들의 인식 방식은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현상도 서로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체계적으로 비교하는 연구가 축적된다면, 책임정치나 행정 신뢰와 같은 주제를 보다 풍부하게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국제적 협력 연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여러 국가의 연구자들과 협력해 하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은 학문적 시너지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우리 대학교를 포함한 한국 학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합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협력 연구가 더욱 확대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번 연구는 정치인이 공공서비스 운영의 주체를 바꾸는 제도적 선택이 행정적 의미를 넘어 정치적 동기와 민주적 함의를 지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내부 위임과 민간 위탁은 서비스의 질 개선이나 효율성 제고를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공공서비스 실패 시 ‘누구를 탓할 것인가’를 좌우하는 정치적 장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연구는 행정적 선택이 시민들의 인식 속에서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지를 그려냄으로써, 행정·정치·시민이 맞물린 책임정치의 역학을 분명히 보여준다.
나아가 문 교수와 공동연구팀은 공공서비스가 잘 작동했을 때 공(credit)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를 묻는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서비스 실패 상황에서의 비난과 성공 상황에서의 공을 함께 분석함으로써 시민들이 정치인·관료·민간 행위자에게 기대하는 역할과 책임 구조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 교수는 끝으로 공공서비스에 대한 비난과 공 부여 매커니즘이 이번 연구의 맥락을 넘어 다양한 정치·행정체계로 확장되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기사 작성: JSC 강승희(UIC 계량위험관리학 21), 김해연(UIC 정치외교학 20) 학생